상사동기(想思洞記 ; 영영전)
홍치 년간에 성균관 진사인 김생(金生)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은 잊었으나, 용모가 준수하고 아름다웠으며 인품이 월등하게 뛰어났다. 그는 글을 잘 지었을 뿐만 아니라 농담에도 능통했으니, 참으로 세상의 기이한 남자라 할만 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그를 풍류랑(風流郞)이라 일컬었다. 약관의 나이에 진사 제1과에 급제하여 이름이 서울에 널리 알려졌으며, 높은 벼슬아치와 지체 좋은 가문에서 재산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고 그에게 사랑스런 딸을 시집보내려고 하였다.
하루는 반궁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말 위에서 멀리 바라보니, 주막의 파란 깃발이 푸른 버드나무와 붉은 살구나무 사이에서 은은히 비치었다. 김생은 봄날의 흥취에 젖어서 목이 마를 정도로 술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흰모시 적삼을 전당잡히고 진주 빛이 나는 홍주(紅酒)를 사서 꽃무늬가 그려진 자기(磁器) 술잔에 따라 마셨다. 술에 취해서 술집 누각 위에 누워 있는데, 꽃향기가 옷에 스미고 대나무 이슬이 얼굴을 적셨다.
잠시 후에 석양이 산마루에 가로 걸치고 새들이 숲 속으로 날아들자, 하인이 집으로 돌아가자고 재촉하였다. 김생은 일어나 말을 타고 채찍을 휘두르며 길에 오르니, 백사장이 원근에 펼쳐져 있고 가느다란 버드나무 가지가 냇가에 드리워져 너울거렸다. 노닐던 사람들도 점차 집으로 돌아가 길거리에는 거의 사람이 없었다. 김생은 흥에 겨워 낮게 시를 읊조려 마침내 절구 한 수를 지었다.
東陌看花柳 동쪽 두렁에 꽃과 버드나무 보이는데,
紫 驕不行 자류마는 교만스레 가려하지 않네.
何處玉人在 아름다운 님은 어느 곳에 있는가?
桃花無限情 복사꽃 흐드러지니 임 그리는 마음 끝이 없네.
김생이 읊기를 마치고 취한 눈을 반쯤 들어 올리는 순간 한 미인이 눈에 띄었다. 나이는 겨우 열여섯 살 정도 되었는데, 사뿐사뿐 걷는 고운 발걸음에 길가의 먼지마저 일지 않았다. 허리와 팔다리는 가냘프고 어여뻤으며, 몸매가 매우 아름다웠다. 그 미인은 가다가 멈추는가 하면, 동쪽으로 향하다가 서쪽으로 걷기도 하고, 기와조각을 주워 꾀꼬리를 희롱하는가 했더니,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고 우두커니 서서 석양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옥비녀를 풀어 윤이 나는 검은 머릿결을 가볍게 흔들자, 푸른 소매는 봄바람에 나부끼고 붉은 치마는 맑은 냇가에 어리어 반짝였다.
김생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마음이 크게 흔들리어 스스로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 말채찍을 재촉해 달려가 곁눈으로 흘끗흘끗 바라보니, 고운 치아와 아름다운 얼굴이 참으로 국색이었다. 김생은 말을 빙빙 돌려 그 주위를 맴돌면서 때로는 앞서기도 하고 때로는 뒤를 좇으면서 정신을 가다듬고 그녀를 주시하였다. 그는 끝까지 그녀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여자도 김생이 감정을 억제치 못함을 알아채고, 부끄러운 나머지 눈썹을 내리깐 채 감히 바라보지를 못했다. 여자가 점점 멀리 나아가자, 김생도 계속 그 뒤를 좇아갔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까지 따라가 보니, 그녀는 마침내 상사동 길가에 있는 몇 칸짜리 작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김생은 어쩔 줄 몰라 그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우두커니 섰는데, 마음이 쓸쓸하고 처량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날은 이미 저물어 있었다. 그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원통한 마음으로 되돌아 왔으나, 멍하니 정신을 잃고 술에 취하거나 바보가 된 듯하였다. 깊은 밤이 되어 머리를 베개에 얹었으나 잠자리는 불편하기만 했다. 밥상머리에 앉아도 먹을 생각이 나지 않았으며, 먹더라도 음식이 목으로 넘어가지를 않았다. 그러다 보니 몸은 고목(古木)처럼 초췌해지고, 안색은 다 타버린 재처럼 참담해졌다.
십여 일이 지난 어느 날, 평소 김생을 따르던 막동이란 자가 찾아왔다.
ꡒ도련님처럼 호방하신 분이 이렇게 근심 어린 얼굴을 하고 계시니, 무슨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으신지요?ꡓ
김생은 막동의 말을 들으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가슴 깊은 곳에 있는 말을 털어놓았다. 막동은 이야기를 들으며 빙긋이 웃다가 김생의 말이 끝나자 입을 열었다.
ꡒ그런 일이라면 근심하실 필요 없습니다.ꡓ
ꡒ남의 일이라고 너마저 그런 소릴 하느냐?ꡓ
ꡒ하하, 제게 좋은 계교가 있으니 쓸데없이 애를 태우지 마옵소서.ꡓ
ꡒ저, 정말이냐? 그래, 내가 그럼 무엇부터 하면 되겠느냐? 네가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 하겠다. 어서 말해 다오!ꡓ
김생이 성급하게 채근하자 막동은 웃음부터 흘렸다. 하지만 너무나 진지한 김생의 눈을 보고 정색을 하더니 계책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ꡒ우선 도련님께선 좋은 술과 안주를 마련하셔서 그 집에 찾아가십시오. 그리고 멀리 떠나는 벗을 전송하는 사람처럼 그 집주인에게 방 한 칸을 빌리셔야 합니다. 그런 다음 술자리를 만드셔서….ꡓ
막동의 얘기를 들으면서 어두웠던 김생의 얼굴은 점점 밝아졌다.
ꡒ그래! 좋은 생각이다! 어째 나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까?ꡓ
김생은 막동의 계책을 칭찬하며 하인들에게 서둘러 준비를 갖추게 하였다. 김생은 여인이 들어갔던 집을 찾아가 방 한 칸을 빌었다. 그리고 미리 약속한 대로 막동에게 손님을 청해 오라 하였다. 막동은 한참 동안 어디를 다녀오는 것처럼 한 후에 나타났다.
ꡒ그래, 지금 온다더냐?ꡓ
ꡒ도련님, 손님께선 오늘 많이 취하셔서 내일 오겠다고 하더이다.ꡓ
김생은 서운한 투로 말했다.
ꡒ서운하구나. 그 사람이 가기(佳期, 아름다운 때)를 그르쳐 좋은 술을 버리게 생 겼으니…. 이 집 주인을 불러서라도 한잔 마시는 것이 낫겠다.ꡓ
주인을 부르니 칠십 정도 된 할머니가 나왔다.
ꡒ할머니께서는 편히 앉으소서. 손님을 전송하러 나왔다가 허탕을 쳤지만 좋은 술이 아까우니 주인과 한잔하고 싶어 불렀소이다.ꡓ
김생은 막동에게 술과 안주를 들이라 하고 그 노파에게 술을 권했다. 이날 김생 과 노파는 취하도록 마셨고, 마치 친한 벗처럼 허물 없는 사이가 되었다. 이 날 김생은 여인 이야기는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이튿날 김생은 좋은 술과 안주를 가지고 또 그 집으로 갔다. 그 날도 역시 막동이 왔다갔다 하였고, 손님 대신 노파와 함께 술을 마셨다. 그 다음날도 김생이 똑같은 준비를 하고 노파를 청하자 막동의 예상대로 노파는 과연 의심이 든 모 양이었다.
ꡒ이 부근 어느 집도 손님을 전송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인데 도련님께선 어찌하여 하필 누추한 저희 집을 골라 사흘씩이나 은혜를 베푸시는지요?ꡓ
ꡒ손님이 오지 않아 이렇게 된 것뿐 무슨 다른 뜻이 있겠소? 또 할머니와 더불어 술을 나누는 것은 손님과 주인 사이에 당연한 것이 아니오.ꡓ
김생은 그렇게 노파를 안심시켰다. 그 날도 두 사람은 술이 떨어질 때까지 마셨다. 김생은 빨간 보자기를 풀어 비단 적삼 하나를 내놓았다.
ꡒ매일 할머니를 괴롭히고도 갚을 것이 없어 걱정했는데 이것이라도 제 정성으로 아시고 받아 주시오.ꡓ
노파는 김생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하면서도 그 속마음을 알 수 없어 근심이 되었다. 노파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바로 일어나서 절을 하였다.
ꡒ제가 과부 되어 살아온 지 오래지만 이웃 사람조차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도련님께서 이렇게 마음을 써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혹 도련님께서 소망이 있으시다면 비록 죽는 일이라도 말씀하소서.ꡓ
그제서야 김생은 얼굴에 슬픈 빛을 띠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ꡒ그렇게 말씀하시니 어찌 사실대로 말하지 않겠소? 제가 어느 날 집으로 가는 길에 한 낭자를 보았습니다. 나이 어린 협기로 뒤를 좇아왔더니 그 낭자가 들어 간 곳이 바로 이 곳이었소. 그런데 그 낭자를 본 뒤부터 마음이 취한 듯 모든 일에 흥미를 잃고 그 낭자만 생각하니, 애끊는 괴로움이 벌써 여러 날이라오.ꡓ 노파는 김생이 여인을 본 날짜와 여인의 복장을 물었다. 노파는 짚이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ꡒ도련님께선 제 죽은 언니의 딸을 보신 것 같습니다. 그 애의 이름은 영영(英英)이라 하는데 정말 탐스러운 아이지요. 하지만….ꡓ
ꡒ하지만 뭐란 말이요?ꡓ
김생은 노파가 무슨 말을 할지 걱정되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노파는 김생 보다 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ꡒ도련님은 그 애를 만나는 것조차 어려울 것입니다.ꡓ
ꡒ그건 무슨 말이요?ꡓ
ꡒ그 애는 회산군(檜山君)의 시녀입니다. 궁중에서 나고 자라 문 밖을 나서지 못합니다.ꡓ
ꡒ그렇다면 전에 내가 본 날은 어인 나들이었소?ꡓ
ꡒ그 때는 마침 그 애 부모의 제삿날이라 제가 회산군 부인께 청하고 겨우 데려왔었지요.ꡓ
ꡒ….ꡓ
ꡒ영영은 자태가 곱고 음률이나 글에도 능통해 진사(회산군을 말함)께서 첩을 삼으려 하신답니다. 다만 그 부인의 투기가 두려워 뜻대로 못 할 뿐이랍니다.ꡓ
김생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탄식하였다.
ꡒ결국 하늘이 나를 죽게 하는구나!ꡓ
노파는 김생의 병이 깊은 것을 보고 안타까워했다. 노파는 그렇게 김생을 바라보고 있다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ꡒ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ꡓ
ꡒ그래요? 그, 그것이 무엇이오? 빨리 말해 보시오.ꡓ
ꡒ단오가 한 달이 남았으니 그 때 다시 작은 제사상을 벌이고 부인에게 영아를 보내 주십사고 청하면 그리 될 수도 있습니다.ꡓ
김생은 그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뻐했다.
ꡒ할머니 말대로 된다면 인간의 오월 오월은 곧 천상의 칠석이오.ꡓ
김생과 노파는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영영을 불러낼 계획을 세웠다.
수심은 비가 되고
마침내 노파와 약속한 날이 되었다. 김생은 날이 밝기도 전에 그 집으로 달려갔다.
ꡒ일이 어떻게 되가오?ꡓ
노파는 아침도 먹기 전에 달려온 그가 우스웠는지 미소를 머금었다.
ꡒ부인께 간절하게 부탁하였더니 처음에는 거절하셨습니다. 진사께서 영아의 출입을 엄히 금하기 때문에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 제가 다시 간곡히 부탁하였더니 진사께서 출타하실 일이 있으니 그 때라면 가능할 것이라 했습니다. 영아가 오긴 오겠지만 진사님 출타 시간을 알 수 없어 언제 올지는 모릅니다.ꡓ
김생은 노파의 말에 기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여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했다. 그는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밖을 내다보며 영영을 기다렸다.
그런데 해가 거의 오시(午時, 낮 11시 30분부터 13시 30분까지)가 다 되어도 나타나는 그림자가 없었다. 김생은 안절부절못하다가 일어서서 부채를 휘둘러 기둥을 치면서 그 노파를 불렀다.
ꡒ바라보고 있으니 눈이 아프고, 근심하니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소. 행인들이 가까워졌다가 곧 다른 데로 가니, 그 때마다 내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소.ꡓ ꡒ지성이면 감천이라니, 도련님은 좀 안정하시지요.ꡓ
두 사람이 이런 말을 주고받는데 먼 데서 신을 끄는 소리가 들려 왔다. 김생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그 발소리는 점점 노파의 집 쪽으로 오는 것이었다. 김생이 창으로 달려가 바라보니 과연 오는 사람 은 꿈에도 그리던 영영 낭자였다.
김생은 기뻐 손뼉을 치는데 마치 어머니를 본 아이처럼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영은 문 앞 버드나무에 붉은 말이 매어 있는 것을 보고 안을 살피며 머뭇거리면서 들어오지 않았다. 노파는 영영을 불렀다.
ꡒ빨리 들어오너라. 여기 도련님은 우리 집에서 손님을 전송하러 오신 분이니 걱정할 것 없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늦었느냐? 네가 못 오는 줄 알고 네 부 모 제사를 그냥 지냈구나. 어서 들어오기나 하려므나.ꡓ
영영이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노파는 술상을 차렸다. 그리고 김생과 더불어 잔을 들고 서로 권하였다. 몇 잔 술이 오갔을 즈음 김생은 미소 지으며 영영에게 말했다.
ꡒ낭자도 이리 가까이 앉으시오. 내가 잔을 채우겠소.ꡓ
그러나 영영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들지 않았다.
ꡒ네가 깊은 궁중에서 자라 세정(世情, 세상 물정)을 알지 못한다지만 술 권하는 예의조차 모르느냐?ꡓ
노파가 그렇게 말한 뒤에야 영영은 잔을 받아 들었다. 김생이 영영에게 술을 부어 주었고, 그녀는 주저하다가 술잔을 잠깐 입술에 대기만 했다. 잠시 후 그 노파는 술에 많이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더니 영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ꡒ아무래도 많이 취한 것 같구나. 좀 쉬어야겠으니 네가 잠시 도련님을 모시고 있거라.ꡓ
노파가 자리를 피해 주어 김생과 영영만 남았다.
ꡒ삼월에 홍화문 앞길에서 서로 본 적이 있는데 낭자는 그 때를 기억하겠소?ꡓ
ꡒ말은 기억하오나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ꡓ
ꡒ사람이 말만 못하오?ꡓ
ꡒ말은 보았으나 사람은 보지 못했나이다.ꡓ
ꡒ낭자는 나를 놀리는구려. 비록 얼굴이 파리하고 몸이 말라서 그 때와 다르긴 하지만 설마 날 모르겠소? 하기야 낭자는 내가 누구 때문에 이리 된 것인지 알 까닭이 있겠소?ꡓ
김생은 안타까운 눈으로 영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영영도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분명 김생을 아는 것 같았다.
ꡒ하기야 낭자는 내가 아닌데 어찌 이 마음을 알겠소?ꡓ
ꡒ도련님은 제가 아닌데 어찌 저의 마음을 아시리오?ꡓ
두 사람은 잠시 눈이 마주쳤다. 영영은 다시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ꡒ한 번 멀리서 바라보고 그리워한 지가 이미 달이 지났는데 이제야 만나 보게 되다니, 참으로 세상이 원망스럽소. 낭자 때문에 죽을 뻔했던 내 목숨은 오늘을 기다려 겨우 살아 남았소.ꡓ
김생의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떨려 나왔다. 그러나 영영은 김생의 말이 끝날 무렵 일어서야 했다.
ꡒ진사님께서 돌아오시면 먼저 저를 찾으십니다. 그만 가야 합니다.ꡓ
김생은 영영의 말에 금방 시무룩해졌다.
ꡒ도대체 어찌하면 좋겠소? 벌써 작별할 때는 다가왔고 다시 만나기는 어려우니….ꡓ
영영이 다시 눈을 들어 김생을 쳐다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안타까운 한숨이 흘러 나왔다.
ꡒ이 달 보름 밤에 진사님은 밖에서 다른 왕자님들과 달을 감상하신다 합니다. 그 날 궁의 무너진 담 쪽으로 오십시오. 도련님께서 오신다면 무너진 담 옆의 작은 문을 열어 놓겠습니다. 그 곳에서 동쪽으로 가면 작은 방이 있사오니 도련님께선 거기에 계십시오.ꡓ
김생은 그제서야 마음을 놓고 영영과 작별하였다. 김생은 노파의 집에서 나와 멀어져 가는 영영을 보고 저도 모르게 시 한 수를 읊었다.
깊고 깊은 저 궁 안에 고운 님 갇혀 있네
손을 놓아 작별 후로 서로 소식 아득하여라
이 날도 잊지 못해 예쁜 얼굴 알뜰한 사랑
하루 속히 서로 만나 좋은 인연 맺었으면
지난 일을 생각하니 수심은 비가 되고
가기(佳期)를 고대하니 하루 해가 한 해 같네
십오야 달 밝은 밤 고운 님 찾고지고
다락 올라 달을 보며 그 옛날을 다시 찾네
김생이 약속한 날짜가 되어 가니, 과연 궁궐 담이 무너져 이가 빠진 것처럼 문이 되어 있었다. 좁고도 깊은 담구멍을 따라 들어가자, 이내 조그만 문이 나타났다. 시험삼아 밀어보니 과연 잠겨 있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 동쪽으로 내려가자 영영의 말대로 과연 별실이 나타났다. 김생은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말했다.
"난향이 나를 속이지는 않았구나."
이어서 김생은 별실로 들어가 영영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밝은 달이 막 솟아오르고, 서늘한 바람이 갑자기 불어왔다. 그러자 계단 위의 뭇 꽃들은 그윽한 향기를 뿜어내고, 뜰 앞의 푸른 대나무는 맑고 시원한 소리를 내었다. 갑자기 문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안쪽에서 어떤 사람이 나왔다. 김생은 영영인지 아닌지 궁금해서 숨을 죽이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듣고 있는데,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옷 향기가 엄습해 왔다. 김생이 눈을 뜨고 바라보니 곧 난향이었다. 김생은 어둠 속에서 나와 영영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대의 사랑 김모(金某)가 이미 여기에 와 있소."
영영이 말했다.
"낭군은 참으로 믿음직스러운 선비입니다."
영영이 즉시 김생의 손을 이끌어 가까이 앉히고 안부를 묻자, 김생이 대답했다.
"만 번 죽을 고생을 견디고 넘어가는 숨을 겨우 보존하고 있을 뿐이오."
영영이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리 되었습니까?"
김생이 말했다.
"땅은 가까운데 사람은 멀기 때문이오."
이렇듯이 두 사람은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몰랐다. 김생이 밝은 달을 쳐다보고는 놀라서 말했다.
"내가 처음 올 때는 이 달이 동쪽 하늘에 있었는데, 지금은 하늘 한 가운데 떠 있소. 밤이 절반쯤 지나가 버렸으니, 이 시간에 동침을 할 수 없다면 장차 어느 때를 기다리란 말이오?"
김생이 즉시 영영의 옷깃을 붙들고 벗기려 하자, 영영이 말리면서 말했다.
"낭군은 어찌 저를 뽕나무밭에서 노는 여자처럼 대하십니까? 별도로 침실이 한 곳 있으니 그 곳에서 좋은 밤을 편안히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김생은 머리를 흔들면서 거절하여 말했다.
"나는 이미 법을 어기고 또 죽음을 탐하여 어렵사리 이곳에 왔소. 한 번 오는 것도 이렇듯 힘들었는데, 어떻게 또 기다릴 수 있겠소? 무릇 일을 처리할 때는 삼가 만전(萬全)을 기해야 하오. 만약 당돌하게 멋대로 행동한다면, 우리 일만 누설될까 두렵소."
영영이 말했다.
"일 누설되고 안 되고는 오로지 나에게 달려 있으니, 낭군께서는 공연히 애태우지 마십시오."
그리고 나서 김생의 손을 이끌어 감싸 안고 들어가자, 김생도 어쩔 수 없이 따라 들어갔다. 김생은 두려움에 떨면서 몸을 구부리고 살금살금 걸어가는데, 문안으로 들어갈 때는 깊은 연못을 굽어보는 듯 두려웠으며, 땅을 밟을 때는 엷은 빙판 위를 걷듯이 조심조심 걸었다. 매번 한 발을 옮길 때마다 아홉 번이나 넘어지고, 땀이 발뒤꿈치까지 흘러내려도 오히려 깨닫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영영을 따라 굽은 계단을 오르고 회랑을 빙빙 돌아서 안으로 들어갔는데, 두세 번 문을 지나서야 커다란 안채에 도달하였다. 궁인들은 모두 잠이 깊이 들어 뜰과 방은 고요했다. 오로지 깁을 바른 창에서 맑은 등불이 가물거리는 것이 보였는데, 그곳이 부인의 침소임을 알 수 있었다. 영영은 김생을 어떤 방으로 들이밀며 말했다.
"낭군은 여기에 조금만 앉아 계십시오."
그런 다음 영영은 즉시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오래도록 나오지 않았다. 김생은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여 자리에 앉거나 눕는 등 안절부절 하였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매우 이상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윽고 어떤 사람이 중문으로 달려 들어와 아뢰는 소리가 들리었다.
"나리께서 들어오십니다."
그 소리와 함께 등불이 뜰 가득히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시녀와 하인들이 이리저리 분주하게 왔다갔다 하면서 대군을 받들어 모시고 들어왔다. 대군은 취해서 뜰 가운데 눕고서도 오히려 깨닫지 못하였으며, 코고는 소리도 점차 깊어갔다. 이때 영영이 부인의 명을 받들고 와서 아뢰었다.
"차가운 땅바닥에 오래 누워 계시면 풍상이 들까 두려우니, 어서 왕자님을 일으켜 안으로 모시랍신다."
잠시 후 사람 소리가 점차 잦아들고 불빛도 꺼졌다. 이윽고 영영이 오른손으로는 옥등(玉燈)을 잡고, 왼손으로는 은병(銀甁)을 붙들고 나와 김생이 숨어 있는 방문을 열었다. 김생은 벽에 붙어서 두 발을 포개고 서 있으면서, 속으로 '이제는 죽었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영영이 웃으면서 김생에게 말했다.
"낭군께서는 얼마나 놀라셨습니까? 제가 위로하고자 따뜻한 술을 가지고 왔습니다."
마침내 영영이 금으로 된 연꽃 모양의 술잔에다 술을 따라 김생에게 권하니, 김생이 받아 마셨다. 영영이 또 한 잔을 권하자, 김생이 사양하며 말했다.
"마음이 정(情)에 있지, 술에 있지 않소."
김생은 즉시 술을 치우게 하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다른 물건은 없고, 오직 붉은 책상 위에는 두초당(杜草堂)의 시집 1권이 흰 구슬로 글을 새긴 낭간에 눌려 있었으며, 탁상 위에는 줄이 짧은 거문고가 하나 가로놓여 있을 뿐이었다. 김생은 즉시 2구를 지어서 먼저 불렀다.
琴書蕭 淨無塵 거문고와 책은 맑고 깨끗하여 티끌 하나 없으니,
正稱空房玉一人 바로 쓸쓸한 방에 앉은 아름다운 여인을 일컫는 것이리.
영영이 이어서 읊었다.
今夕不知何夕也 오늘밤은 어떠한 밤인가?
錦衾瑤席對佳賓 비단 이불 구슬 자리에 고운 님과 마주 앉았네.
이윽고 김생과 운영은 서로 이끌고 함께 잠자리에 들어가 비로소 마음껏 사랑을 나누었다. 밤이 다 끝나갈 즈음에 새벽닭이 꼬끼오 울며 날 밝기를 재촉하고, 멀리서 파루를 알리는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왔다. 김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옷가지를 챙겨 입고 탄식하며 다급히 말했다.
"좋은 밤은 괴로울 정도로 짧고 사랑하는 두 마음은 끝이 없는데, 장차 어떻게 이별을 하리오? 궁궐 문을 한 번 나가면 다시 만나기 어려울 터이니, 이 마음을 어떻게 하리오?"
영영은 이 말을 듣고 울음을 삼키며 흐느끼더니, 고운 손으로 눈물을 흩뿌리면서 말했다.
"홍안박명은 옛날부터 있었으니, 비단 미천한 저에게만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살아서 이렇듯 이별하니, 죽어서도 이렇듯이 원통할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은 꽃이 시들고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과 같으니, 굳이 날씨가 추워지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낭군은 철석같은 마음을 가진 남아인데, 어찌 소소하게 아녀자를 염려하다가 성정(性情)을 해쳐서야 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낭군께서는 이별한 뒤에는 제 얼굴을 가슴속에 두어 심려치 마시고, 천금같이 귀중한 몸을 잘 보존하십시오. 또 학업을 계속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운로에 올라 평생의 소원을 이루시길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옵니다!"
이어서 영영은 토끼털로 만든 붓을 뽑고 용꼬리를 새긴 벼루를 연 다음, 난봉전을 펼쳐 놓고 칠언율시(七言律詩)를 한 수 지어 이별에 부치었다.
幾日相思此日逢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워하다가 오늘 만났던고?
綺窓 幕接手容 깁 바른 창 수놓은 휘장 안에서 손잡고 마주하였네.
燈前不盡論心事 등불 앞에선 마음을 다 털어놓지 못하고,
枕上旋驚動曉鐘 베갯머리에선 새벽 종소리에 놀라 일어났네.
天漢不禁烏鵲散 은하수는 오작이 흩어지는 것을 막지 못하니,
巫山那復雲雨濃 언제 다시 무산의 비구름 짙어질 것인가?
遙知一別無消息 한 번 이별한 뒤 아득히 소식은 알 길 없고,
回首宮門鎖幾重 겹겹이 잠긴 궁궐 문을 되돌아보기만 하네.
김생은 영영의 시를 보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으며,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즉시 붓을 적셔 화답(和答)하였다.
燈盡紗窓落月斜 등불 꺼진 사창(紗窓)에 달이 이우니,
乖離牛女隔天河 견우와 직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이별하네.
良宵一刻千金直 좋은 밤의 일각 천금만큼 귀하니,
別淚雙行百恨和 두 줄기 이별 눈물에 온갖 한이 사무쳤네.
自是佳期容易阻 이제 아름다운 기약 용이치 않으리니,
由來好事許多魔 참으로 호사에 다마로구나.
他年縱使還相見 먼 훗날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無限恩情奈老何 한없는 은정(恩情)에 늙은들 어떠하리.
영영은 김생의 시를 펼쳐 놓고 보려고 하였으나 눈물이 글자를 적셔 다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김생의 시를 거두어 품속에 넣고 묵묵히 말을 못한 채 손을 잡고 서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때 새벽 등불은 희미해지면서 동창이 밝아오려 하였다. 이에 영영은 김생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나와 무너진 담장 밖에서 전송하였다. 두 사람이 서로 흐느끼되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니, 죽어서 이별하는 것보다 더 비참하였다.
이윽고 김생은 집으로 돌아왔으나, 넋을 잃어 물건을 보아도 보이지 않고 소리를 들어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의 어떤 일도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한 통의 편지를 써서 간절한 마음을 전달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상사동의 노파도 이미 세상을 떠나서 다시 편지를 부칠 길마저 없는지라, 김생은 희망을 잃고 헛되이 몽상(夢想)에 젖어 있기만 했다.
그러나 세월은 천연히 흘러가고 광음은 돌연히 바뀌어 온갖 근심 속에서도 3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마음이 일에 따라 변하듯 영영에 대한 그리움도 점차 줄어들었다. 김생은 다시 학업을 일삼아 경전(經典)과 서적(書籍)에 침잠하고 힘써 문장을 닦았다. 홰나무 꽃이 누렇게 물드는 시기가 되어 김생은 과거 시험장에서 나라 안의 모든 선비들과 함께 자거를 다투었다. 그는 시험을 치를 때마다 거듭 합격하여 마침내 뭇 사람들 가운데서 장원으로 뽑히었다. 이로 인해 김생의 이름은 널리 빛나 당대(當代)에는 그와 견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3일 동안의 유가에서 김생은 머리에 계수나무 꽃을 꽂고 손에는 상아(象牙)로 된 홀을 잡았다. 앞에서는 두 개의 일산이 인도하고 뒤에서는 동자들이 옹위(擁衛)하였으며, 좌우에서는 비단옷을 입은 광대들이 재주를 부리고 악공들은 온갖 소리를 함께 연주하니, 길거리를 가득 메운 구경꾼들이 김생을 마치 천상의 신선인 양 바라보았다.
김생은 얼큰하게 술에 취한지라, 의기(意氣)가 호탕해져 채찍을 잡고 말 위에 걸터앉아 수많은 집들을 한 번 둘러보았다. 갑자기 길가의 한 집이 눈에 띄었는데 높고 긴 담장이 백 걸음 정도 빙빙 둘러 있었으며, 푸른 기와와 붉은 난간이 사면에서 빛났다. 섬돌과 뜰은 온갖 꽃과 초목들로 향기로운 숲을 이루고, 희롱하는 나비와 미친 벌들이 그 사이를 어지러이 날아 다녔다. 김생이 누구의 집이냐고 물으니, 곧 회산군(檜山君) 댁이라고 하였다. 김생은 문득 옛날 일이 생각나 마음속으로 은근히 기뻐하며, 짐짓 취한 듯 말에서 떨어져 땅에 눕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궁인(宮人)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몰려나오자, 구경꾼들이 저자처럼 모여들었다.
이때 회산군은 죽은 지 이미 3년이나 되었으며, 궁인들은 이제 막 상복(喪服)을 벗은 상태였다. 그 동안 부인은 마음 붙일 곳 없이 홀로 적적하게 살아온 터라, 광대들의 재주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시녀들에게 김생을 부축해서 서쪽 가옥으로 모시고, 죽부인을 베개삼아 비단 무늬 자리에 누이게 하였다. 김생은 여전히 눈이 어질어질 하여 깨닫지 못한 듯이 누워 있었다.
이윽고 광대와 악공들이 뜰 가운데 나열하여 일제히 음악을 연주하면서 온갖 놀이를 다 펼쳐 보였다. 궁중 시녀들은 고운 얼굴에 분을 바르고 구름처럼 아름다운 머릿결을 드리우고 있었는데, 주렴을 걷고 보는 자가 수십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영영이라고 하는 시녀는 그 가운데 없었다. 김생은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하였으나 그녀의 생사를 알 수가 없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한 낭자가 나오다가 김생을 보고는 다시 들어가서 눈물을 훔치고, 안팎을 들락거리며 어찌할 줄 모르고 있었다. 이는 바로 영영이 김생을 보고서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차마 남이 알아 챌까봐 두려워한 것이었다.
이러한 영영을 바라보고 있는 김생의 마음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날은 이미 어두워지려고 하였다. 김생은 이곳에 더 이상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나 주위를 돌아보고는 놀라서 말했다.
"이곳이 어디입니까?"
궁중의 늙은 노비인 장획(藏獲)이라는 자가 달려와 아뢰었다.
"회산군 댁입니다."
김생은 더욱 놀라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이곳에 왔습니까?"
장획이 사실대로 대답하자, 김생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가려고 하였다. 이때 부인이 술로 인한 김생의 갈증을 염려하여 운영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은 서로 가까이 하게 되었으나, 말 한 마디도 못하고 단지 눈길만 주고받을 뿐이었다. 영영은 차를 다 올리고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면서 품속에서 편지 한 통을 떨어뜨렸다. 이에 김생은 얼른 편지를 주워서 소매 속에 숨기고 나왔다.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와 뜯어보니, 그 글에 일렀다.
박명한 첩 영영은 재배하고 낭군께 사룁니다. 저는 살아서 낭군을 따를 수 없고, 또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잔해만이 남은 숨을 헐떡이며 아직까지 살아 있습니다. 어찌 제가 성의가 업어서 낭군을 그리워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늘은 얼마나 아득하고, 땅은 얼마나 막막하던지! 복숭아와 자두나무에 부는 봄바람은 첩을 깊은 궁중에 가두고, 오동에 내리는 밤비는 저를 빈방에 묶어 놓았습니다. 오래도록 거문고를 타지 않으니 거문고 갑(匣)에는 거미줄이 생기고, 화장 거울을 공연히 간직하고 있으니 경대(鏡臺)에는 먼지만 가득합니다. 지는 해와 저녁 하늘은 저의 한을 돋우는데, 새벽 별과 이지러진 달인들 제 마음을 염려하겠습니까? 누각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면 구름이 제 눈을 가리고, 창가에 기대어 생각에 잠기면 수심이 제 꿈을 깨웠습니다. 아아, 낭군이여! 어찌 슬프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또 불행하게 그 사이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시어 편지를 부치고자 하여도 전달할 길이 없었습니다. 헛되이 낭군의 얼굴 그릴 때마다 가슴과 창자는 끊어지는 듯 했습니다. 설령 이 몸이 다시 한 번 더 낭군을 뵙는다 해도 꽃다운 얼굴은 이미 시들어 버렸는데, 낭군께서 어찌 저에게 깊은 사랑을 베풀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 낭군 역시 저를 생각하고 있었는지요? 하늘과 땅이 다 없어진다 해도 저의 한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아아, 어찌하리오! 그저 죽는 길밖에 없는 듯 합니다. 종이를 마주하니 처연한 마음에 이를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편지 끝에 다시 칠언절구(七言絶句) 5수가 씌어 있었다.
好因緣反是惡緣 좋은 인연이 도리어 나쁜 인연이 되었으나,
不怨郞君只怨天 낭군은 원망스럽지 않고 하늘만 원망스럽네.
若使舊情猶未絶 만약 옛 정이 아직 끊이지 아니하였다면,
他年尋我向黃泉 먼 훗날 황천(黃泉)으로 날 찾아오소서.
一日平分十二時 하루는 균등(均等)하게 열두 때로 나뉘었으니,
無時無日不相思 어느 날 어느 때인들 님 그리지 않았으리.
相思何日期相見 언제나 그대를 만날 수 있을까 시름타가,
深恨人間有別離 깊은 한 맺힌 채 이 세상을 이별하네.
柳憔花悴若爲情 사랑하는 마음은 버드나무와 꽃처럼 시들어,
鏡裡猶憂白髮生 거울 보면 근심으로 백발만 자란다네.
自是佳人無好事 이제 고운 님에게 좋은 일 없으리니,
墻頭晨鵲爲誰鳴 담장머리의 새벽닭은 누굴 위해 울거나?
別來忍掃席中塵 이별한 뒤 마지못해 방석의 먼지 털려는데,
愛有郞君坐臥痕 낭군이 앉은 자취 애틋하기도 하구나.
寂寞深宮消息斷 깊고 적막한 궁궐에 소식은 끊어지고,
落花春雨掩重門 봄비에 지는 꽃은 겹겹으로 닫힌 궁문(宮門)을 가리네.
欲寄音書寄得難 편지를 보내려 해도 부치기 어려워,
幾回呵筆綠窓間 푸른 창가에서 몇 번이나 언 붓을 녹였던고.
空敎別後相思淚 쓸쓸히 이별한 뒤 님 그리워 흘린 눈물,
點滴花 一班班 꽃무늬 종이에 방울방울 떨어져 아롱지네.
김생은 다 읽은 뒤에도 오랫동안 편지를 만지작거리며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하였으며, 영영을 그리는 마음은 예전보다 두 배나 더 간절하였다. 그러나 청조가 오지 않으니 소식을 전하기 어렵고, 흰기러기는 오래도록 끊기어 편지를 전할 길도 없었다. 끊어진 거문고 줄은 다시 맬 수가 없고 깨어진 거울은 다시 합칠 수가 없으니, 가슴을 조리며 근심을 하고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 못 이룬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김생은 마침내 몸이 비쩍 마르고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워 있었다. 그렇게 두어 달이 지나니 김생은 죽은 몸이나 다름없었다. 마침 김생의 친구 중에 이정자(李正字)라고 하는 이가 문병을 왔다. 정자는 김생이 갑자기 병이 난 것 을 이상해 했다. 병들고 지친 김생은 그의 손을 잡고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정자는 모든 이야기를 듣고 놀라며 말했다.
ꡒ자네의 병은 곧 나을 걸세. 회산군 부인은 내겐 고모가 되는 분이라네. 그 분 은 의리가 있고 인정이 많으시네. 또 부인이 소천(所天, 아내가 남편을 일컫는 말)을 잃은 후로부터, 가산과 보화를 아끼지 아니하고 희사(喜捨)와 보시(布施)를 잘 하시니, 내 자네를 위하여 애써 보겠네.ꡓ
김생은 뜻밖의 말을 듣고 너무 기뻐서 병든 몸인데도 일어나 정자의 손이 으스러져라 꽉잡을 정도였다. 김생은 신신 부탁하며 정자에게 절까지 하였다. 정자는 그 날로 부인 앞에 나아가 말했다.
ꡒ얼마 전에 장원 급제한 사람이 문 앞을 지나다가, 말에서 떨어져 정신을 차리 지 못한 것을 고모님이 시비에게 명하여 사랑으로 데려간 일이 있사옵니까?ꡓ
ꡒ있지.ꡓ
ꡒ그리고 영영에게 명하여 차를 올리게 한 일이 있사옵니까?ꡓ
ꡒ있네.ꡓ
ꡒ그 사람은 바로 저의 친구로 김모라 하는 이옵니다. 그는 재기(才氣)가 범인 (凡人)을 지나고 풍도(豊道)가 속되지 않아, 장차 크게 될 인물이옵니다. 불행하게도 상사의 병이 들어 문을 닫고 누워서 신음하고 있은 지 벌써 두어 달이 되었다 하더이다. 제가 아침저녁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문병하는데, 피부가 파리해 지고 목숨이 아침저녁으로 불안하니, 매우 안타까이 여겨 병이 든 이유를 물어 본 즉 영영으로 인함이라 하옵니다. 영영을 김생에게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ꡓ
부인은 듣고 나서,
ꡒ내 어찌 영영을 아껴 사람이 죽도록 하겠느냐?ꡓ
하였다. 부인은 곧바로 영영을 김생의 집으로 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꿈에도 그 리던 두 사람이 서로 만나게 되니 그 기쁨이야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김생은 기운을 차려 다시 깨어나고, 수일 후에는 일어나게 되었다. 이로부터 김 생은 공명(功名)을 사양하고, 영영과 더불어 평생을 해로하였다.
# 작품 줄거리
명나라 효종 때 소년 선비 김생이 있었는데 용모가 뛰어나고 쾌활하였다. 어느 날 취중에 한 미인을 만나 사모하게 되었다. 남자종인 막동이가 미인이 사는 집 노파와 친하게 되어, 그 미인이 회산군(성종의 다섯 번째 아들)의 시녀 영영임을 알게 된다. 김생의 그리움이 더해지자 노파가 주선하여 영영과 만나게 되나 동침만은 거절당한다. 그 뒤 김생은 회산군집에 몰래 들어가 영영과 하룻밤을 동침하고 헤어진다. 이들은 만날 길이 없는 가운데 3년이 지났는데, 그리움으로 자결까지 하려던 김생은 과거를 보고 장원급제를 한다. 삼일유가(三日遊街 :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사흘 동안 시험관과 선배 급제자와 친척을 방문하던 일)를 하다 회산군 집에 들어간 김생은 영영과 편지만 주고받는데, 이때 회산군은 죽은 지 3년이 되었다. 김생이 영영을 잊지 못해 상사병으로 거의 죽게 되었는데, 회산군 부인의 조카인 친구(이정자)가 김생의 사연을 말하여 영영을 보내주게 하였다. 김생은 벼슬도 사양하고 영영과 여생을 보낸다.
# 이야기 전개 구조
1. 명나라 효종 때 성균진사 김생이 있었는데 용모가 뛰어나고 쾌활하였다. 어느 날 술에 취해
한 미인을 만나 사모하게 되었는데 남자종인 막동이가 미인이 사는 집 노파와 친하게 되어,
그 미인이 회산군의 시녀 영영임을 알게 된다.
2. 김생의 그리움이 더해지자 노파가 주선하여 영영과 만나게 되나 동침만은 거절당한다. 그
뒤 김생은 회산군집에 몰래 들어가 영영과 하룻밤을 동침하고 헤어진다.
3. 이들은 만날 길이 없는 가운데 3년이 지났는데, 그리움으로 자결까지 하려던 김생은 과거를
보고 장원급제를 한다. 삼일유가(三日遊街,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사흘 동안 시험관과 선배
급제자와 친척을 방문하던 일)를 하다 회산군 집에 들어간 김생은 다시 영영을 보게 되나
편지만 주고 받는다.
4. 김생이 영영에 대한 그리움으로 앓아 눕자, 회산군 부인의 조카인 친구가 김생의 사연을 말
하여 영영을 보내주게 하였다. 김생은 벼슬도 사양하고 영영과 여생을 보낸다.
# 이해와 감상
‘영영전’은 작자, 연대 미상인 한문본의 애정 소설이다. 대개의 고전 소설 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뒤에 융성했던 것처럼 애정 소설도 이 시기 이후 많이 창작되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 비해 많이 창작되었다는 것일 뿐 여전히 그 수는 적었다. 사실 조선 사회에서 애정 문제만큼 억제되고 제한된 것은 없다. 조선은 건국 초 기, 고려 가요들을 ꡐ음란하다[淫詞]ꡑ 하여 일부만 남겨 두고 없애 버렸다. 그 나마 일부 남은 노래들도 같은 이유로 가사를 바꿔 버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 에 더하여 조선의 통치 이념인 유학은 여자들의 행동을 엄격히 통제하여 문 밖 출입도 어렵게 했다. 근본적으로 남녀의 만남조차 봉쇄했던 것이다. 혹 만나는 일이 생기더라도 ‘남녀 칠세 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으로 철저히 서로 피하는 것이 미덕임을 강조했다. 이런 사회 배경 속에서 애정 소설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남녀의 애정 문제가 소설의 주제에서 물러설 수는 없다. 사랑은 소설의 영원한 주제이며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한 주제가 되기 때문이다. 다만 여염 집 여인들의 행동을 심하게 규제했으므로 이들의 사랑을 소재로 삼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이런 까닭으로 일부 양반들이 기생(妓生)들과 벌인 애정 행각 이외에는 이렇다 할 애정 이야기가 전해지기 힘들었다. 이런 규제가 임․병 양란 이후 약화면서 이전에 비해 많은 애정 소설들이 나왔던 것이다.
임.병 양란 이후는 여러 면에서 변혁의 시기였다. 명분보다 실천과 현실을 중시하게 되면서 실용적인 학풍인 실학이 중시되고, 평민 의식이 급성장했다. 특히 전쟁 중에 무기력했던 유학자의 권위주의를 배격하면서 허례 허식보다 인간의 감정에 보다 충실한 분위기로 변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번졌고, 고전 소설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애정 소설 역시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조선 전기에 비해 훨씬 자유로워진 것이다. 또한 배경 면에서 초기에는 중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았는데, 여기에는 애정 문제를 용납하지 않는 조선의 사회적 분위기도 한 몫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후기에 이르러서는 조선 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제법 나와 그 변화 양상을 실감하게 한다.
하지만 한계는 있다. 아무리 변화된 상황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여염집 여인과의 사랑을 꿈꿀 수는 없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의식이 변환된 것은 사실이지만, 여염집 여인의 자유 연애가 강조될 만큼 체제가 흔들리지는 않았던 것이다.
# ‘운영전’과 ‘영영전'의 비교
애정 소설로는 「운영전」을 비롯하여 「옥단춘전」, 「숙영낭자전」, 「채봉감 별곡」, 권필의 「주생전」 등을 우선 꼽을 수 있다. 이들 중 「운영전」은 여러 면에서 「영영전」과 비슷하다. 먼저 「영영전」의 줄거리를 살펴본 다음 두 작품의 공통점을 알아보자.
소년 선비 김생은 한 여인을 우연히 보고 저도 모르게 사랑에 빠진다. 김생은 마침내 상사병으로 눕게 되었다가, 막동의 도움으로 그녀의 이모인 노파에게 접근한다. 노파는 그녀가 영영이란 이름의 궁녀로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김생은 노파의 도움으로 영영을 만나게 되고, 이 두 사람은 다시 영영이 있는 궁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김생이 궁으로 몰래 들어가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누게 되지만 이후 노파가 죽어 서로 연락할 길이 끊어진다. 삼년 후 김생은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삼일 유가(三日遊街,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사흘 동안 돌아다니는 일)를 하다가 우연히 영영을 만나게 된다. 김생은 다시 상사병으로 눕게 되어 거의 죽게 되었는데, 주변의 도움으로 겨우 영영과 맺어지고 이후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
이상의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구성 및 소재 면에서 「운영전」과 매우 비슷하다. 우선, 두 작품 모두 궁녀와 선비의 사랑을 그 소재로 하고 있다. 깊은 궁궐 속에 있는 궁녀와 사랑에 빠진다는 소재는 굳이 조선 사회의 엄격함을 말하지 않아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런 흔하지 않은 소재가 두 소설의 공통점이 된다는 것은 두 작품의 연관성을 생각하게 한다.
둘째, 영영과 김생 두 사람이 사랑을 이루는 데 노파가 조력자로서 수행하는데, 이것은 「운영전」에서도 보이는 것이다. 셋째, 사랑을 얻기 위해 김생이 영영 이 있는 궁궐로 몰래 들어가는 모험적인 행동을 보여 주는데, 모험적인 사랑이라는 흔치 않은 이야기 역시 「운영전」에서도 보인다. 물론 결말에 있어서 죽음으로 끝나는 「운영전」에 비해 「영영전」은 행복한 결말(happy ending)이지만, 여러 가지 공통점으로 보아 이 두 작품은 어느 편의 작가가 모방했던가, 동일한 작가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이 작품은 다른 고전 소설과는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고전 소설 하면 흔히 전기성, 사건 전개의 우연성 남발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그런 것을 찾기 어렵다. 「영영전」의 두 주인공 김생과 영영이 사랑을 이루는 공간 은 바로 현실 공간이며, 이들의 절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우연이 아닌 필연에 의해서만 만나고 헤어지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 당시로선 뛰어난 구성력과 현실감을 보여 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결론적으로 고전 소설 중에서 이 작품은 권선 징악 같은 유교적 덕목을 강조하지도 않았고, 순수한 남녀의 애정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현실적이며 모험적인 사랑을 과감히 보여 준 보기 드문 작품이라 하겠다.
# 핵심 정리
(1) 갈래 : 고전 소설
(2) 특징 :
① 한시나 편지글 등 다양한 종류의 글을 삽입하여 인물의 심리를 전하고 있음.
② 중심 갈등은 인물들과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는 사회 환경 사이(김생-선비,영영-궁녀)에서 형성되고 있다.
(3) 주제
① 고난을 뛰어넘는 사랑의 실현
② 김생과 영영의 사랑
③ 신분을 극복한 사랑의 성취
(4) 신소설의 작가 이해조는 이 작품의 설정을 빌려<잠상태(岑上笞))라는 한문 소설을 짓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