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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한 -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1992/문예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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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전을 배우는 시간
최시한
7월 1일
남들은 즐겁게 사는데 나만 그러지 못한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럴 만한 뾰족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으니, 어디 심하게 아프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나는 그렇다 치고, 똑같은 노릇을 날마다 되풀이하면서 다들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모르겠다. 좌우간 즐거운 사람들 때문에 시끄럽다. 거리와 차 속을 가득 채운 유행가, 아무 데서나 터지는 방정맞은 웃음소리, 기름진 음식들을 우적우적 씹는 소리, 삼삼칠 박수소리, 와아 하는 함성, 함성, 우우우, 너는 왜 즐거운 표정을 안 짓는 거지?――한 달쯤 앓고 나타나면, 나를 손가락질하며 그렇게 따지지는 않겠지. 좀 이상한 방법이긴 하지만, 즐겁지 않은데도 즐거운 척하는 것보다는 낫다.
7월 2일
K는 직접 볼 때보다 생각할 때가 더 좋다. 이름도 진짜 이름을 부르기보다는 이렇게 K라고 하는 게 마음에 든다. 실제의 K가 밉거나 싫어서가 아니다. 싫다면 왜 K라고 부르겠는가? 단 둘이 앉아 얘기해본 적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하여튼 말도 직접 하거나 편지에 써 보내기보다는 이렇게 중얼대기만 하는 편이 어울리는 것 같다. 바로 옆 반이니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날 수 있는데, 정말 이상스런 짓이다. 계속 그러다 보니, 어떤 때는 K가 머리칼이 길고 살결이 고운 이경미하고 같은 사람인지 아닌지 헷갈린다. 
그래도 K, 내가 지금 부르는 이가 정작 누구든지 간에, K, 너도 가끔은 자기가 다른 무엇이 되는 게 싫지는 않겠지?
7월 3일
윤수가 운동장 조회 중간에 갑자기 쓰러졌다. 내가 양호실까지 업고 갔다. 나보다 몸집이 큰데도 어떻게 업고 갔는지 모르겠다. 옆에 있던 4반 여자 애들은 소리만 지르고, 우리 반 녀석들은 멀거니 보고 있기만 한 게 화가 났던 것 같다. 윤수는 곧 깨어났다. 군인들처럼 줄지어 서서, 줄곧 하지 마라 소리나 들으면서, 뙤약볕이 내리쬐는 운동장에 너무 오래 있은 탓이다. 나나 윤수나 군인감이 못 된다. 
양호실을 나오려니까 윤수는 같이 있어 달라며 내 손을 잡았다. 아주 시원한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양호실 안에서 한 시간 넘어 함께 있었다. 윤수는 얼마 있다가 스르르 잠들었다. 창백한 얼굴에 하얀 이불을 덮고 잠들어 있는 윤수를 지키고 있자니 이상스레 마음이 편안했다. 둘째 시간 시작종이 울려 교실로 가려니까, 윤수가 눈을 뜨며 말했다. 왠지 너하고 있으면 말을 안 더듬을 것 같은 느낌이 전부터 들곤 했다고. 
셋째 시간이 끝나고 가보니 윤수는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가 오셔서 데리고 갔다고 했다. 시간을 낭비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 두 시간 동안 교실에서 수학과 화학 책을 뒤적일 게 아니라 양호실에서 윤수하고 있는 편이 나았을 거다. 윤수를 지키고 있던 양호실의 그 조용함과 편안함이 그런 책 속에는 없으니까. 책에는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많으니까(하지만 그런 조용함이 나 편안함 따위는 시험에 안 나온다).
7월 4일
그 사람은, 눈보라치는 산마루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이쪽을 보았다. 덥수룩한 수염, 푹 패인 볼, 무릎이 해어진 남루한 군복. 하지만 그는 키가 크고 어깨가 벌어졌으며 두 눈이 찌를 듯 빛났다. 그가 들고 있는 길고 거무스레한 총. 온몸에 탄띠를 감고 있어서 마치 갑옷을 입은 것 같다. 나이를 짐작 할 수 없는 그는, 투사이다. 
그는 험한 산길을 종일 걸어서 그 마루까지 왔다. 길은 아직도 멀다. 그의 모습 뒤로, 눈보라 속에 엄연히, 커다란 붓으로 문질러 놓은 듯한 산맥이 보인다. 그가 잠시 멈춘 것은 아직도 계곡의 눈구덩이 속을 못 빠져나온, 짐을 잔뜩 지고 거친 숨 내뿜는 말들, 어른처럼 묵묵한 소년병들, 피에 젖은 붕대가 딱딱하게 얼어붙은 부상병들, 그들의 끝없이 긴 행렬을 돌아보기 위해 서다. 동료들은 또 하나의 마루를 잘 넘어설 것이다. 그가 몸을 돌려 산 너머로, 눈보라 속으로 사라진다…… 비장한 음악이 점점 커진다. 끝을 알리는 글자들이 그가 떠난 공간에 탄환처럼 박힌다. 
그 장면이 자꾸만 떠오른다. 아예 머리속에 찍혀 버린 성싶다. 묘하게도 다른 장면들은 생각나는 게 별로 없고, 그 장면을 처음 보았을 때의 떨림도 희미해 가지만, 어깨에 달린 수류탄이 몸짓에 따라 조금 움직이던 것까지 생생히 기억할 수 있다. 모든 게 어떤 심오한 상징 같다. 예수의 머리에 얹힌 가시관이나 부처의 이상스런 손가락처럼, 그 장면을 이루었던 하나하나가 다른 무엇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눈보라는 그의 적들 같다. 해어진 군복은 그의 상처받은 마음이다. 그렇다면 총과 탄환과 그의 빛나는 눈은 적개심이요 투쟁정신을 뜻한다. 
그런데 그 눈보라는 왜 그리도 아름다웠을까? 해어진 군복은 어째 그렇게 당당해 보였으며, 그리고 빛나는 눈, 그 눈은 한없이 슬퍼 보이기도 하지 않았던가? 아름다운――적, 상처받은 마음의――당당함, 슬픈――투쟁정신……말이 안 된다. 말도 안 된다.
7월 5일
남들이나 나나 모두가 억지로 살아간다는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한 하루였다. 남들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곤 했는데, 오늘은 무슨 변덕인지 모르겠다. 전부가 시들하고 지겨웠다. 선생님은 월급 때문에 수업을 하고, 학생들은 효자가 되기 위해서거나 불량학생이 되지 않기 위해 자율학습을 하는 것 같았다. '자율학습'이라니, 얼마나 웃기는 말이냐. 수업이 다 끝났는데도 학생들이 몇 시간씩이나 '자율적으로' 책상에 고개를 처박고 있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자율대학의 졸업장을 따야만 자율적인 사람이 된다? 다들 말장난에 놀아나는 꼴이다. 이건 무엇을 세뇌하는 수용소지 학교가 아니다. 
버스 안에서 이런 공상을 하였다. 억지로 운전대를 잡고 있는 기사가 노상 같은 길로만 다니는 자기 자신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몸부림치다가, 차를 한강 속으로 밀어 넣는다. 모두 죽는다. 
저승 문 앞에서 기사를 만난 승객들은 반갑게 그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한다. 고맙습니다. 용기가 없어 개 끌려가듯 억지로 살았는데 당신 덕에 벗어났습니다. 
그 공상을 할 때는 나도 승객들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무언가 서운하다. 중요한 무엇, 내가 아니면 못하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고, 그래서 나는 살아났어야 될 성싶다. 
다음 국어시간에 배울 허생전을 읽었다. 숙제라서 억지로 읽었는데 점점 재미가 나 두 번이나 읽었다. 
허생이 마음에 든다. 
그는 대단한 실력을 가졌다. 등장인물들 가운데서 우뚝할 뿐더러 나라까지 좌우할 만한 비범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왜 자기가 꾸민 천당 같은 섬에서 글 아는 자들을 모두 데리고 나올까? 그는 '화근'을 없애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글 아는 자가 화근이 된다니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다. 자기도 글 아는 선비이면서. 
돈을 벌고, 도둑들을 천당 같은 섬에서 살게 해주고, 이완대장을 꾸짖고 한 그 모든 일들도 자기가 글을 읽었기에 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잠까지도 억지로 자는 기분은 아니다. 허생전을 읽은 덕분이다.
7월 6일
윤수가 쭈뼛쭈뼛 따라 나오더니 교문 근처에 와서야 빵을 먹으러 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한테 빚을 진 사람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걔가 자진해서 입을 여는 게 흔한 일도 아니고. 
빵집에서 윤수는 포크를 만지작거리며 먹는 걸 쳐다만 보더니 불쑥, 부탁이 있으니 솔직하게 말해 달라고 했다. 그러겠다고 했는데도 크림빵을 하나 더 먹도록 또 포크만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나는 왜냐 선생이 굉장히 좋다, 하지만 왜냐 선생 시간은 공포의 연속이다. 국어 선생님이 좋다면서 그 분 시간이 왜 공포의 연속이냐고, 나는 물으려다가 말았다. 국어 선생님이 왜냐? 왜냐? 하시면서 이 사람 저 사람 지적을 할 때면 아닌게 아니라 겁이 나기도 했다. 윤수 같은 애야말로 무서워할 만했다. 신이 나거나 대답이 모두 시원찮아 화가 나시면 두 눈을 부릅뜨고 땀까지 흘리면서 질문을 연방 퍼부으니까. 왜냐? 이 말이 왜 나왔느냐? 조금 전에 너는 왜 그런 말을 한 거냐? 
윤수는 내 낯이 간지러운 얘기들을 웃지도 않으면서 늘어놓았다. 너는 책도 많이 읽고, 교지에다 소설도 쓰고, 국어 선생님한테 귀여움도 받는 그런 애니까, 허생전 숙제를 봐 달라, 솔직하게 평을 좀 해 달라……내가 귀여움을 받는다고?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왜냐 선생은 내가 들어 있는 문예반 담당이시니까. 
선생님은 언젠가 내 글을 보고 말씀하셨다. '글은 손으로 쓴다기보다 마음으로, 결국은 온몸으로 쓰는 거다.' 속뜻은 잘 모르겠지만 그 말씀이 잊히지 않는 걸 보면, 또 글을 잘 쓰고프면 무어든지 자꾸 말로 그려내라고, 글감이란 게 어디 고상한 데에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하신 말씀이 머리에 새겨져 있는 걸 보면, 내 얼굴에도 국어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쓰여 있을 거다. 
선생님은 허생전의 줄거리를 잡아오라는 숙제를 내셨다. 그냥 말로 하는 게 좋은데, 좌우간 누구를 시킬지 모르니까 말하기가 자신 없는 사람은 써와 읽어도 좋다고 하셨다. 윤수는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쓴 것을 내밀었다. 빠뜨린 얘기도 있고 말이 어색한 데도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이 나를 놀라게 하였다. 그걸 적어두어야 한다. 
'아무도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서 허생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 버렸다. ' 그러니까 허생은, 아내, 변부자(卞富子), 이완대장, 그리고 양민이 된 도둑들까지 모두가 자기를 알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이 싫어서 숨어 버렸다는 거다. 그 말이 찌릿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아주 엉뚱하면서도 그럴 듯한 면이 있어 윤수를 다시 봐야겠다는 느낌과 함께, 왠지 내가 정말 솔직하게 평을 해주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는 말은 책에 없잖아?" "이, 이튿날 가보니 집이 텅 비어 있더라는 말이 끝에 있다구. 
그 이유를 대야만, 말이 되지." 
"그건 그래. 관계를 잘 따져서 조리가 서게 요약하라고 그러셨으니까. 내 말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는 게 좀 억지스럽단 말야. 변부자는 처음 만났는데도 허생한테 엄청난 돈을 빌려주었어. 변부자는 허생을 알아주었다구." 
"변부자는 사람이 허생한테 대면, 내, 내 생각에 변부자는 돈만 많지 허생을 잘 알 수 없는 사람이라…… 허생은 외톨이거든. 
아는 거하고 알아주는 건 다, 다르던가?…… 네 말이 맞을거야. 
그래, 변부자는 어쨌든 돈을 빌려주었어. 그렇다면 이완대장도 그래. 허생이 뛰어난 사람인 걸아, 알기는 알거든. 잘못했어. 
그걸 왜 생각 못했을까. 그, 그럼, 뭘 어떻게 고쳐야 되지?" 그 물음에 무어라고 대답했는지는 정리가 잘 안 된다. 꼭 고쳐야 될 만큼 말이 안 되지는 않는다.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뭐 그런 뜻을 표시한 데 불과하다. 나는 횡설수설했다. 나중에 곰곰 생각해보니, 윤수의 그 '알아주지 않아서'라는 말에서 허생이 아니라 윤수의 마음을 읽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걸 곧이곧대로 말하거나 금방 어떻게 고치라고 해서는 안 될 성싶었고, 솔직하겠다 해놓고 그러려니까 횡설 수설하고 만 것이다. 정말 윤수가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애라서 허생전을, 아니 허생의 마음을 그렇게 읽은 걸까? 그렇다 하더라도 솔직하게 말해 주지 않은 게 과연 잘한 일일까? 따지고 보면 허생은 끝내 자기한테 걸맞는 대접을 받지 못한 사람이니까 윤수의 말은 단지 그걸 두고 한 말일 뿐이라 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좌우간 나는 솔직하지 못했다. 윤수가 찜찜한 표정을 지은 건 당연하다. 말이 이상하다면서 그냥 두라고 한 셈이 되었으니까. 
나하고라 그런지 윤수는 오늘 별로 더듬지 않았다. 더듬은 건 바로 나다. 
윤수보다 내가 마음이 약하다. 아니다. 턱없이 강해서 제멋대로 넘겨짚고는, 제 생각에 제가 어쩔 줄 모른다.
7월 7일

 
허생전을 배우지 않아서 김이 빠졌다. 국어 선생님이 회의 때문에 수업을 하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 짝하고 서로 번갈 아 줄거리를 말해보라는 전갈을 보내셨다. 경석이의 얘기를 듣고는 우스워서 혼났다. '허생은 가난한 사람이었는데, 아내가 돈을 못 번다고 하니까 돈을 많이 벌어서 전부 변부자한테 다 주어 버리고, 이완대장이 말을 안 들으니까 죽이려다가 도망쳤다'―― 이게 '경석이의 허생전'이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어서, 나중에는 슬그머니 재미가 나서 거푸 꼬집어 댔다. 아내한테 앙갚음하려고 돈을 벌었단 말이지? 번 돈을 모두 다 변부자한테 주었다고 어디에 쓰여 있니? 돈 번 얘기하고 이완대장 혼내 준 얘기는 아무 관계도 없냐?…… 좀 지나치고, 부질없는 짓이었다. 
윤수의 자리 쪽이 유난히 시끄러웠다. 동철이가 윤수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줄거리가 적힌 공책을 보여 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동철이는 사내자식이 뭐가 부끄럽다고 계집애처럼 어쩌고 하는 심한 소리까지 했다. 윤수도 나중에는 단단히 작정한 표정으로 유난히 더 더듬으며, 네가 내 글을 보고 무어라고 할지 뻔하기 때문이다. 나야 어쩌거나 상관 말고 잘난 사람은 잘난 사람답게 자기 숙제나 잘하라고 쏘아 댔다. 어쩌다 윤수가 공부건 운동이건 제 욕심대로 돼야 직성이 풀리는 동철이하고 짝이 됐는지 모르겠다. 
나중에 애들이 하는 얘기를 얼핏 들으니 왜냐 선생 회의에 참 석한 게 아니고 교장실에서 교장 선생님과 싸웠다고, 화장실에 갔다 오다 누가 보았다고 했다. 왜냐선생님이 이겼을 거다. 왜냐선생님의 막강한 무기는 왜냐? 그것이니까. 그 이상의 무기가 어디 있는가.
7월 8일

 
언제나 지하도 계단의 그 자리에서 구걸하는 등 마는 등 않아 눈망울을 굴리는 그 사람. 행려병자. 그 사람의 무릎이 해어진 옷 때문에 영화에서 본 투사가 다시금 떠올랐다. 같은 옷인데도 주는 느낌이 얼마나 다른가. 같은 옷을 입었는데도 사람은 또 얼마나 다르냐. 
행려병자는 왜 행려병자가 될까. 투사는 어떻게 해서 투사가 되는 것일까. 
아무래도 나는 행려병자에 가깝다. 열흘만 세수를 안 하고 옷도 갈아입지 않으면, 누구든지 뚜릿뚜릿 마구 정면으로 쳐다보면, 줄거리 없는 이 생각 저 생각을 다 팽개치고 아예 길바닥에 퍼질러 앉으면, 그러면 된다. 크로마뇽인이나 네안데르탈인처럼 벌거벗은 채 지하도 동굴과 건물들의 골짜기를 헤매다가, 쓰레기통을 뒤져 허기진 배를 채우면 된다. 
K가 보고 싶다. 다 얘기하고 싶다. 안 된다. 동정 따위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허생이 부럽다. 허생은 가난하고 이름 없지만 자기가 무슨 일을 해야할지 훤히 꿰뚫고, 돈 많은 사람과 지위 높은 사람을 거뜬히 이기고, 뜻한 일을 모두 이룬다. 모두 이룬다? 하여간 허생같은 능력을 지니기만 했다면 겉모습이야 크로마뇽인이면 어떻고 행려병자면 어떤가. 그까짓 동정 따위, 할 테면 하라지.
7월 9일

 
허생전을 배웠다.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인사를 마치자마자 선생님께서는 그 작달막한 체구에 잘 안 어울리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왜 줄거리 잡기 숙제를 냈느냐? 아이들이 불안한 눈빛으로 킥킥 웃었다. 그건 소설의 줄기, 그러니까 핵심된 사건이 어떻게 시작되고 끝났나를 붙드는 힘을 기르기 위해섭니다. 자, 그럼 누가 먼저 얘기할까? 선생님은 교단에서 내려서셨다. 그 가뿐한 몸놀림에서 나는 선생님의 젊음을 느꼈다. 
아이들마다 제각기 다른 허생전을 얘기했다. 허생이 도둑들을 데리고 간 섬이 일본이라는 식의 엉뚱한 말도 나왔지만, 거의가 그럴 듯하게 들렸다. 같은 글이 그렇게 달리 읽힌다는 게 신기했다. 서너 사람의 발표를 들었을 무렵부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를 다른 애들이 벌써 다 해 버린 성싶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얘기는커녕 남들이 한 정도의 얘기도 못할 것 같았고, 머리가 점점 털실뭉치가 돼 가는 기분인데다, 선생님을 실망시키면 어쩌나 싶어 초조했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불만스런 표정으로 우리를 둘러보셨다. 그리고 질문의 방향을 바꾸셨다. 
"김동철, 허생은 왜 과일과 말총을 죄다 사 모았을까요?" 동철이가 일어서며 말했다.
"네. 돈을 벌기 위해섭니다. " 
"내 시간에는 앉아서 대답해도 좋다고 했죠? 그래, 앉아요. 돈을 벌기 위해서라…… 그럼, 돈은 왜 벌었나요?" 
"돈을 벌어야 변부자한테 진 빚도 갚을 수 있고, 가난해서 도둑이 된 사람들도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하건 돈이 있어야 된다는 걸 허생은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백만 냥 가운데 오십만 냥을 바다에다 버린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돈이 많을수록 할 수 있는 일도 많아질 텐데? 허생이 그랬다는 건 챙겨 읽었죠?" 
"네. 읽었습니다. 허생은 나라가 작아 그 많은 돈을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버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허생은 애초에 꾼 돈이 만 냥뿐이고, 오십만 냥만 가지고 가도 일을 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에 버린 것입니다. " 
"그렇게도 볼 수 있겠군요. 그런데 왜 허생은 자기와 아내를 위해서는 돈을 남겨두거나 쓰지 않았을까요? 돈의 힘을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동철이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기다리셨다. 잠시 후에 동철이가 드문드문 말을 이었다. 
"그 당시에는, 선비는 돈을 무시해야 대접을 받으니까…… 그래도 변부자가 먹을 것은 대주니까……. " 
선생님은 또 기다리셨다. 동철이의 말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자 입을 여셨다. 
"동철이는 나름대로 열심히 읽었어요. 하지만 허생의 행동들을 충분히, 그리고 조리 있게 설명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게 됐는지, 누가 그 까닭을 말해봐요." 다들 입을 다물고 있었다. 동철이도 못한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안 서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얼마 뒤에 맨 앞줄의 용준이가 입을 열었다. 
"변부자가 먹을 걸 대준 것보다 허생이 돈을 바다에 버린 게 먼저인데, 동철이 말 대로면, 허생은 변부자가 먹을 걸 대줄 걸 미리 단정하고 버렸다는 얘긴데, 그건 좀 허생답지 못한 행동 같습니다." 
"네, 일리가 있는 지적이에요. 행동의 앞뒤 관계를 따졌군요. 
하지만 중요한 사건, 핵심적인 내용과 관계된 지적은 아니라고 봅니다. '허생답지 못하다'는 표현도 애매하고요. 사실 동철이가 허생의 행동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것도 근본적인, 근본적인 원인과 이유를 여러 각도에서 따져 보지 않은 까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사가 그래요. 밑동을 보려고 해야 돼요. 가지 끝이나 잎사귀만 보면 혼란에 빠지기 쉽죠. 내가 동철이한테 처음에 했던 질문, 왜 과일과 말총을 죄다 사 모았느냐는 질문으로 되돌아가서, 동철이의 해석이 어째서 허생의 다른 행동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는지 알아봅시다. 허생은 어째서 하필이면 과일과 말총을……." 
그 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윤수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선생님의 말씀을 자르며 말했다. 의외였다. 
"선비가 도, 돈을 벌려고만 그, 그랬다고 하니까, 허생을 거, 겉 다르고 속 다른 가짜 선비로 마, 만들었……." 
아이들이 와아 웃었다. 윤수의 어깨가 움찔하면서 말이 끊겼다.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동철이의 얼굴도 나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걔는 자존심이 상한 게 분명했다. 
선생님은 얼굴을 찌푸리며 소리치셨다. 다른 사람이 말을 하는데 왜 웃나! 그러고 나서 음성을 낮추어 윤수한테 말씀하셨다. 
좋은 지적인데, 말을 마저 해요. 
윤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 침묵이 견딜 수 없었다. 무식하고 잔인한 놈들. 가슴이 마구 방망이질 쳤다. 
그 때 동철이의 말이 들렸다. 
"다시 생각해 보니, 허생은 자기가 잘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도우려고 돈을 벌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몫은 남겨두지 않은 겁니다." 
잘나빠진 놈! 놈이 채뜨리지만 않았으면, 윤수가 말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럼 정리해 봐요. '왜'를 넣어서, 과일과 말총 사 모으는 부분을 동철이가 요약해 봐요." 
"허생은, 돈을 벌어서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려고, 과일과 말총을 사 모았다……." 
"그게 아니고(내 목소리가 너무 큰 것 같았다), 제 생각은, 윤수하고 비슷합니다. 동철이는 자꾸 돈 돈 그러는데, 허생을 잘못 본 겁니다. 책에, 허생 자기는, 재물 때문에 정신을 괴롭히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셨다. 갑자기 몸이 주체할 수 없도록 커지는 기분이었다. 선생님은 똑 똑 끊어서 말씀하셨다. 새로운 주장이, 나왔군요. 그렇게 읽는다면, 과일과 말총을 사고파는 사건은, 어떻게 요약되죠? 나름대로 다시 해보세요. 
"과일과 말총은 주로 양반들과 관계있는 물건입니다. 그러니까, 허생은 과일과 말총을 사 모아서 양반들을 혼내 주었다.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옆에서 경석이가 옆구리를 찔렀다. 야야, 허생한테 혼난 양반은 이완대장이라구. 과일 땜에 혼난 양반은 없어. 나는 상관하지 않고 윤수 쪽을 보았다. 도와주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선생님께서 내 대답을 흡족하게 받아들이는 눈치였으므로, 오히려 윤수가 받을 칭찬을 가로챘는지도 몰랐다. 게다가 선생님의 다음 말씀은, 내가 윤수 대신 복수를 하지도 못했다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양반들을 '혼내 주었다'는 말은 '비판했다'는 말로 바꾸는 게 적절하겠죠. 당시에 과일이 제사나 잔치에 주로 쓰였다는 점, 그리고 말총은 양반들이 쓰는 망건과 갓을 만드는 데 쓰였다는 점을 참고한 말입니다. 꽤 여러 모로 생각하면서 읽었어요. 그런데 양반들을 곤란에 빠뜨리고 그들로 하여금 돈을 많이 쓰게 한 것도 사실이지만, 동철이 말대로, 허생이 그런 걸 휩쓸어 사두었다가 값이 오르니까 팔아서 떼돈을 번 것도 사실이죠. 너무 돈만 생각해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그걸 무시해도 무리가 생깁니다. 
허생에게 있어 돈은 목적이 아니죠. 그렇다고 해서 가난한 백성들을 돕는 수단까지 아니라고 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선생님은 천천히 걸어서 교단으로 올라가셨다. 이제 질문이 그치나보다 싶어 몰래 한숨을 내쉬는 아이들이 있었다. 
"소설은, 신문기사하고는 다릅니다. 요새는 신문의 기사 글도 그럴 때가 있기는 하지만, 소설을 이루고 있는 말은 말속에 또 말이 있죠. 그리고 그 말 곧 속뜻을 풀어내는 실마리도 소설 안에 갖춰져 있습니다. 그걸 읽어 내려면 행동의 앞뒤 관계를 따지고, 인물들의 심정을 헤아리고, 여러가지 관련 지식과 사실들을 참고해야 합니다. 나는 금방 '읽어 낸다'는 표현을 썼는데, 달리 보면 그건 주어진 뼈대와 틀에다 독자가 '읽어 넣는다'고 할 수도 있어요. 우리가 하고 있는 게 바로 그런 일인데, 더 계속 해 봅시다. 
허생이 과일과 말총을 사고 판 행동에 대해 양반을 비판하기 위해서라는 해석과 돈을 벌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라는 해석이 나왔죠. 자, 그럼 그 두 가지는 전혀 다른 것인 지, 아니면 서로 어떤 긴밀한 관계가 있는지 살펴봅시다. 그걸 알려면 먼저, 허생이 돈을 벌어서 어디어디에 썼나를 챙기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러다 보면 허생이 돈을 벌고 쓴 행동에 담긴 속뜻이 양반 또는 벼슬아치 비판과 어떤 관계에 있는 지가 드러날 테니까요. 어디어디에 썼죠?" 
더 적을 수가 없다. 윤수한테 신경을 쓰다가, 동남쪽의 섬이 어떻느니 이완대장이 왜 일마다 어렵다고 했느니 등등까지 주고받은 그 뒤는 잘 듣지 않았다. 게다가 손도 아프고, 적다 보니 자꾸 무얼 꾸며 넣는 것 같기도 하다. 소설을 쓰려는 게 아닌데 말이다. 허생이란 사람이 정말 있었다면, 박지원도 허생전을 쓰면서 이랬을 거다. 자기 뜻대로 의미를 붙이고, 뭘 넣거나 빼 버리고. 선생님의 마지막 말씀이 떠오른다―― "이번 시간에는 사건들, 그리고 그것이 연결되어 이루는 줄거리 중심으로 살폈는데, 다음 시간에는 허생이 누구냐, 허생이란 인물이 과연 어떤 기질과 생각을 지닌 사람이냐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다른 인물들과 비교하면서 잘 읽고 생각해 오세요." 
허생이 누구냐고? 선생님의 질문엔 끝이 없다. 이번에는 왜냐가 아니라 누구냐이다. 나도 참 병이다. 끝이 없는 질문들을 졸졸 쫓아가며 베끼고 있으니. 손이 아파서 더 못 쓰겠다고 그 아픈 손으로 써 놓고, 그러고도 자꾸 더 쓰고 있으니. 나란 사람은 누구냐? 총이 아니라 연필을 든, 투쟁정신으로 빛나는 눈이 아니라 신경을 너무 써서 핏발이 선 눈을 가진, 투사가 아닌 환자. 환자? 어떤 환자? 
윤수가 더듬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면 아예 나서서 말을 하려고 들지 않든가. 허생의 행동, 허생 읽기. 윤수의 행동, 윤수 읽기. 나의 행동, 나 읽기. 읽기는 언제나 내가 한다. 허생전 읽기는 꽤 재미가 있는데, 다른 읽기는 왜 그렇게 갈피를 잡을 수 없는지 모르겠다. 아니, 허생 읽기나 나 자신 읽기나 갈피를 못 잡기는 마찬가지다. 머리속이 복잡한 크로마뇽인!

 
7월 10일

나의 K, 너는 듣고 있겠지. 긴 머릿단 속에 꿈꾸듯 숨어 있는 뽀오얀 두 귀로, 밤이 깊으니 너는 저 어둠 속에서 가만히 내 말소리에 젖기만 하렴. 
K, 작고 예쁜 네 귀도 어쩔 수 없이, 낮에 학교를 가득 채웠던 그 어지러운 말들을 들었겠지? 그 얘기가 하고 싶어, 당분간 일 기든 뭐든 단 한 줄도 쓰고 싶지 않았던 어제의 심경을 버리고, 이렇게 너를 불러냈다. 
국어 선생님께서 오늘 또 시간에 들어오시지 않은 건 바로 그 '노동조합'때문이었다. 교직원들이 모여서 만들었다는 그 단체 때문에 요새 날마다 신문과 방송에서 떠들어대는 걸 너도 알고 있겠지. 너희 반 국어도 왜냐 선생님 담당이니까. 아니 그러잖아도 그 문제 때문에 학교가 왈칵 뒤집혔으니까. 선생님께서 거기 가입하신 것도 알고 있을 거다. 
K, 너하고 이런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다. 이런 번잡스런 얘기는 너한테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겠니? 나는 지금 누군가에게 이 답답한 심정을 쏟아 놓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 몰인정한 사람들. 동료가 집중포화를 맞고 있는데, 다른 선생님들은 천연스레 수업을 진행하였다. 학생들도 그렇다. 학기가 끝나 가는데 진도가 어떻다느니, 선생님의 수업방식이 참고서나 대학 입시하고는 너무 거리가 있다느니 하는 엉뚱한 말들을 창피한 줄도 모르고 지껄여 댔다. 그렇다고 당장 어떻게 해야 한다는 방안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너무들 무관심했다. 
나의 이 답답함이 남들의 무관심 때문만은 아니다. 국어 시간이었다. 담임선생님이 오셔서, 자습을 해라, 너희들은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니까 쓸데없는 관심 갖지 말고 공부나 하라는 지시를 하고 가셨다. 공부만 하면 되니까 공부나 하라…… 나는 그 말을 되씹으며 자꾸 슬퍼지는 마음을 억누르느라 허생전만 건성으로 읽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엔가 교실 전체가 논쟁마당이 되어 있었다. 논쟁의 한쪽 대장은 동철이였다. 나중에 동철이는 회장이라도 되는 양 아주 일어서서 이렇게 말했다. 교사는 노동자가 아니다, 그러니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건 잘못이다, 법이 그렇고 스승에 관한 우리나라의 전통이 그렇다.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떠들던 말이어서 새로울 게 없는데도 동철이는 제 말처럼 당당하게 내뱉었다. 여러 다른 아이들 역시 처음 듣고 감동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게 우스웠다. 앞자리의 용준이가 나섰다. 우리가 법을 알면 얼마냐 아냐, 그리고 노동에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 있다고 배웠는데 선생님은 정신노동자가 아니냐, 좌우간 왜냐 선생 무슨 나쁜 일에 나설 분은 아니니까 섣불리 입방아 찧지 말고 기다려 보자. 
동철이가 이내 대꾸를 했다. 나는 왜냐 선생 나쁜 사람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누구든 판단을 잘못할 수는 있다. 정부에서 막고 다른 선생님들도 동의하지 않는 일을 하는 건 잘못이다. 
반대하는 사람들이 우리도 다 아는 정신노동 육체노동을 몰라서 그럴 것 같냐? 
경석이도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 아버지가 그러는데, 무슨 노동조합이든 거기에 드는 사람은 모두 빨갱이 라더라. 
K, 내 마음은 분명 선생님 편이지만, 선생님께서 '판단'을 잘하셨는지 잘못하셨는지, 잘했다면 왜 그런지 알 수 없어서 논쟁에 끼어들 수 없었다. 그런 문제에 대해 내가 너무 아는 게 없음을 절감하였다. 다른 애들처럼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자기 것처럼 뇌까리기는 죽어도 싫고, 솔직히 말해서 그런 일이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부터가 마땅찮았다. 선생님께서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조합에 가입하셨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선생님은 왜냐 선생이니까. 그러면 알면서도 왜 그러셨을까? 선생님도 나처럼 때때로 모든 사람이 한심스럽게 보여 남들을 너무 무시하신 걸까? 
논쟁이 한참 벌어지고 있는데 윤수가 내게로 왔다. 윤수는 나를 교실 뒤꼍의 라일락 나무 그늘 속으로 데리고 갔다. 휴식 시간이 아닌데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윤수는 흥분해서 심하게 더듬거렸다. 걔의 말을 주워 모으면 이렇다. 왜냐 선생 결국 쫓겨날 거다, 허생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을 거다, 자기편이 너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윤수는 내게 물었다. 너는 물론 왜냐선생 편이지?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물은 뜻은 그게 아니었다. 윤수는 말했다. 그렇다면 너는 왜 동철이와 싸우지 않느냐, 어서 들어가서 동철이 녀석의 주장을 꺾어라, 너처럼 글도 잘 쓰 고 말도 술술하는 애가 안 한다면 누가 하겠냐. 
K, 나는 무척 곤혹스러웠다. 나 역시 왜냐 선생 너무 외로운 처지고 어쩌면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윤수가 바라는 행동 같은 걸 하러 나서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어떻게 될지, 아직 잘 모르는 상태가 아니냐. 동철이 따위 하고 싸워서 이겨 봐야, 무슨 소용이냐…… 나는 더듬고 있었다. 
예쁘고 똑똑한 나의 K, 왜 나서고 싶지 않았느냐고 묻지 말아 다오. 나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나서고 싶지 않았는지 나설 수 없었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이유를 대라면 무어라 하기는 하겠지만, 어떤 말이든 결국은 적절치 않게 될 터이다. 이상스럽다는 듯이 윤수는, 잘 모른다니, 노동자니 빨갱이니 하는 말을 모른다는 거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뭐, 뭘 모른다는 거야? 왜냐, 왜냐 선생 옳다는 걸 아, 알고 있잖아?" 
동철이가 집단의 질서를 들먹거리며 여전히 떠들고 있는 교실에 들어서면서, 나는 왠지 자신이 그 어느 때보다도 비참하게 여겨졌다. 
K, 윤수가 말했듯이, 선생님이 학교에서 쫓겨나 정말 허생처럼 어디론가 가 버리게 된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허생이 살던 그 때와 다름없어지는 셈이다. 아니, 허생은 자진해서 가지만 선생님은 쫓겨서 가는 거니까 그 때보다 더 어두운 세상이다. 아, 알겠다. 허생이 왜 그 천당 같은 섬에서 글 아는 자들을 모두 데리고 나왔는지. 지금 왜냐 선생을 '화근'으로 취급하여 몰아붙이는 이들도 알고 보면 모두 그 아는 자들이 아니냐. 
네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K, 나도 내가 우습다. 지금 이 판에 허생전을 따지고 있으니 말이다. 어떻든지, 선생님이 허생만한 능력을 가지고 계셨으면 좋겠다. 아니면 이완대장들이 모두 허생전에서처럼 황급히 뒷문으로 도망을 치거나. 나로서는 지금 그런 일이나 바랄 수밖에 없다. 
이완대장들은 왜 '안된다'고만 하는 걸까? 세상에 이완대장은 왜 그렇게 많을까? 
아아, 그만두자 K, 말은 이제 그만 하자. 
나만의 K, 너의 그 뽀오얀 귀를 닫으렴. 소리가 안 들리게 잠의 달빛 속에 아주 잠가 버리렴.

 
7월 11일

 
허생전 둘째 시간. 흥분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나는 지금 모든 걸 떠올릴 수 있다. 앞으로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선생님은 전처럼 인사를 마치자마자 교단을 내려서시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씀하셨다. 허생이 어떤 사람이냐에 대해 살펴볼 차례지요? 
아이들은 모두 선생님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다시 나타나신 게 무슨 큰 짐이라도 벗은 양 홀가분하고 기뻐서, 나도 책 펴는 걸 잊고 있었다. 
"모두들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건, 왜냐?" 
왜냐 선생 말씀에 몇 아이가 키득키득 웃었다. 선생님도 어색하게 웃으시며 전보다 더 카랑카랑해진 성싶은 음성으로 스스로 답하셨다. 내가 그 까닭을 모를 리가 있느냐. 나는 가르치는 사람이고, 전보다 더 잘 가르칠 수 있기 위해서 하는 일이니까, 이상하게 여기거나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수업에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조금 망설이시다가 덧붙였다. 우리는 각자 자기 마음대로 걷고 있는 것처럼 여기지만, 실은 닦여진 길로 가고 있다. 우리는 때로 그 길이 어디로 향한 것인지 살펴보고, 필요하다면 새 길을 닦아야 한다. 
선생님은 책을 펼쳤다. 우리도 따라 펼쳤다. 교실은 갑자기 활기로 가득 찼다. 
"자, 먼저 허생전에 나와 있는 사실들을 근거 삼으면서, 허생이 어떤 사람인가를 나름대로 얘기해 봐요." 
"배짱이 두두욱한 사람 같습니다." 
누군가 걸찍하게 말하자 아이들이 와아 웃었다. 선생님의 얼굴이 한결 펴졌다. 
"같습니다라는 표현은 될 수 있으면 쓰지 않는 게 좋아요. 생각을 잘 간추린 뒤에 자신있게 잘라 말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 
"장사 수완이 아주 좋은 사람입니다." 
"아내를 전혀 돌보지 않는 걸 보면, 좀 매정한 데가 있습니다." "형식에 매이지 않고 과감하게 일을 추진하는 사람입니다." "외로운 사람입니다. 친구가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의로운 사람입니다. 홍길동하고 비슷합니다." 
"돈과 재물을 하찮게 여깁니다." 
"아닙니다. 허생은 돈을 굉장히 중요시하는데요?"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또 돈이 문제군요. 아무래도 여러분이 돈에 관해 너무 관심이 많거나, 좀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지난 시간에 그 문제는 다소 정리되지 않았나요? 그 문제하고 씨름했던 동철이가 해결해 보는 게 어떨까?" 
"네. " 동철이가 일어서려다 도로 앉았다. 
"허생은 돈을 벌어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썼는데, 거기에는 무능하고 허례허식에 빠진 벼슬아치들과 양반계층을 비판하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까 허생은, 돈을 중요시했다기보다……." "허생은 돈을 목적으로가 아니라 수단으로 중요시했던 거죠." 선생님은 고쳐서 마저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그런데 그 문제는, 각도를 달리해 보면 또 얻는 게 있습니다. 
허생의 생각이나 마음도 마음이지만, 허생이 그런 방법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두고 볼 때, 당시 사회의 경제규모가 얼마나 작았고 통치자들이 백성들 살아가는 형편에 얼마나 무관심했나를 짐작할 수 있죠. 그러고 보면, 아까 누가 얘기한 것처럼. 허생의 생각이나 수완은 그 당시로서는 아주 놀랍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선생님!" 
경석이가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이 작품은 좀 잘못된 데가 있는 것 같습……니다. 허생은 선비인데, 선비가 그렇게 장사를 해도 됩니까?" 
아이들이 야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뭐 별것 아니라는 듯이 경석이는 턱을 쳐들며 눈을 게슴츠레하게 떠 보였다.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선생님은 경석이한테 미소를 보내셨다. 
"하지만 작품에 잘못된 데가 있다고 하기 전에, 먼저 작품을 있는 그대로 놓고 이해해 보려고 해야 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처럼 말이죠. 그럼 먼저, 같이 확인해 봅시다. 허생은 선비입니까 아닙니까?" 
"선빕니다!" 
다들 합창하듯이 말했다. 
"자기가 선비라는 걸 강하게 내세웁니까 그러지 않습니까?" 그 물음에는 모두 잠잠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책을 잘 살펴보라고 시간을 주셨다. 나는 처음부터 확신했다. 그래서 조금 있다가, 돈을 되돌려주려는 변부자에게 허생이 한 말을 소리내어 읽었다. 
"재물로 해서 얼굴에 기름이 도는 것은 당신들 일이오…… 그 대는 나를 장사치로 보는가?" 
선생님은 나한테도 흡족한 미소를 보내셨다. 나는 선생님과 눈을 맞추고 질문을 기다렸다. 
"잘 지적했습니다. 그런 말하는 걸 보면, 허생은 자기가 선비 또는 사대부라는 걸 강하게 의식하면서 내세우고 있음을 알 수 있죠. 아까 허생이 홍길동 비슷하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럼 홍길동과 허생의 차이점은 무얼까요?" 
"홍길동은 도술을 쓰는데, 허생은 머리를 씁니다. 말하자면 허생은, 지식인입니다." 
잘 찾았군요. 그럼 내친 김에 질문을 하나 더 하겠습니다. 
홍길동도 가난한 이들을 돕고 허생도 그러는데, 그 돕는 행동에도 어떤 차이점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막막했다. 그것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나는 긴장되어 손을 떨면서 그냥 떠오르는 대로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홍길동은, 일종의, 투사입니다. 홍길동은 자기 부하들이나 자기가 돕는 이들과 하나가 되어 싸우고, 끝에 가서 승리합니다. 
그러나 허생은, 돕기만 할뿐 어디까지나 선비이고, 그래서 결국 지고…… 맙니다." 
허생이 누구한테 졌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아니 허생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이길 수 있는 사람이라 여겨 왔는데, 홍길동하고 비교하다 보니 말이 그렇게 되었다. 선생님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커다란 소리로 말씀하셨다. 
"지금 한 말을 잘 들었겠죠? 참말 멋진 지적입니다! 본인도 얼마쯤은 그 뜻을 알고 말했겠지만, 그 말에는 참으로 깊은 뜻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두고두고 곱씹을 만한 뜻이 담겨 있어요. 
우리가 이렇게 소설을 읽고 궁리하는 건 바로 그런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섭니다. 
허생은 홍길동 같은 영웅처럼 보이지만 사실 영웅답지 못해요. 
경석이가 했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면, 허생은 장사해서 돈을 벌고 그걸로 가난한 백성들을 돕지만, 항상 선비로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는 한 번도 선비의 자리, 양반사대부라는 자리를 떠난 적이 없다 그 말입니다. 허생은 장사를 하지만 장사꾼을 경멸하고, 백성을 돕고 북벌책 같은 국가대사를 논하지만 조정에 뛰어 들어 적극적으로 그것을 실천하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사농공상을 구별하던 당시의 규범, 때가 아니면 초야에 은둔한다는 선비의 처세관에 묶여서 거리를 두고 비판하거나 도와줄 뿐, 하나가 되어 함께 살고 책임지지는 않는 겁니다. 이 점이 바로 허생의 한계요 허생전을 지은 연암 박지원의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사회를 비판은 하고 있지만, 그 사회를 바로잡으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지는 않았습니다. 양반계층의 생각, 사대부가 쓰는 말을 버리지 못하고 있어요." 
선생님은 질문하기를 잊으신 듯, 그런 뜻의 말씀을 오래 더 하셨다. 허생전이 한글이 아니라 한문으로 쓰여진 것도 그런 한계와 관련이 있다고 하셨다. 그러고는, 공책에다 홍길동이 꾸민 율도와 허생이 꾸민 동남쪽 섬이 어떤 점에서 서로 비슷하고 다른지에 관해 적어 보라고 하셨다. 
내가 궁리 끝에 두어 가지를 생각해 내고 적으려는데, 갑자기 동철이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허생이 졌다는 건, 누구한테 졌다는 말씀입니까? 책에는 허생이 그냥 어딘가로 가 버렸다고 되어 있잖습니까? 선생님께서는 투쟁을 강조하시는데,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동철이의 말투에 화가 났고, 개가 말하고픈 내용이 짐작되어 가슴이 졸아들었다. 선생님은 동철이가 서 있는 걸 그대로 둔 채 천천히 말씀하셨다.
"허생이 졌다는 말은, 허생의 행동전체를 놓고 독자인 우리가 평가하느라고 쓴 말입니다. 허생은 확고한 이상과 탁월한 능력을 지녔지만 그걸 다 실현하지 못했고, 그러니 불만스런 현실과 그 현실을 지배하는 사람들한테 졌다고 본 겁니다. 도피했다고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럴 만한 근거가 있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달리 말할 수 있어요. 그게 문학입니다. 자, 그럼 나름대로 해석해봐요, 허생은 왜 어디론가로 가 버렸느냐?" 그런 말씀을 하시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이상스레 딱딱해져 갔다. 동철이 때문에 화가 나 그러시는가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선생님께서 힐끔 보신 복도 쪽 거기, 어떤 사람 둘이 서 있었다. 한 사람은 교감 선생님이었다. 수첩에 무얼 적고 있는 다른 사람은 낯이 설었다. 감시를 하는구나. 동철이의 말이 먼 데서 들려 왔다. 
"허생이 어디론가 가 버렸다는 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이야기 중에도 그렇게 끝나는 게 많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허생이 국가를 안정시키는 큰일을 실제로 많이 했다는 사실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무얼 더 바라시는 것 같은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거면 충분합니다. 허생은 영웅입니다.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영웅 말입니다." 
"말은,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도구예요. 그게 전달하는 뜻이 그 속에 고정되어 있다기보다, 어떤 입장에서 어떤 의도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뜻이 결정되고 변한다는 얘깁니다. 산은 언제나 산이지만, 그걸 가리키는 산이라는 말은 등산가가 쓰는 경우하고 터널기술자가 쓰는 경우에 그 느낌과 뜻이 다른 데가 있단 얘깁니다. 지금 영웅이라는 말을 썼는데, 그런 의미라면 보기에 따라 이완대장도 영웅일 수 있습니다. 아까 내가 허생이 영웅이 아니라고 했을 때의 영웅은……." 
그 때 교실 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복도에 있던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성큼 교단 위로 올라섰다. 나는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선생님은 잠시 묵묵히 서 계시더니 학생들 사이에서 나와 교단으로 올라가셨다. 이제 교단 위에는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교단 이 산처럼 까마득히 높아 보였다. 그 위에서 세 사람 모두가 나만 뚫어져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선생님의 떨리는 음성이 들려 왔다. 
"오늘은 여기서 중단해야 되겠습니다. 다음 시간이 언제죠?" "다, 다, 다음 주 워, 월요일입니다." 
"박윤수, 고마워요. 오늘이 금요일이니까 사흘 뒤군요. 그 날은, 허생전에 그려졌거나 그려지지는 않았어도 그 작품이 나왔던 당시의 사회상황에 대해 살피겠습니다. 특히 실학사상과 북벌론이 어떤 것이고 그들이 이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를 공부해 오세요." 
세 사람이 나갔다. 그들의 발소리가 복도에서 멀어져 갔다. 
교실은 쥐죽은듯이 조용했다. 느닷없이 윤수가 동철이의 멱살을 쥐며 무어라고 외쳤다. 너무나 더듬어서 짐승의 울음소리 같았다.
7월 12일

 
이런 꿈을 꾸었다. 
눈보라치는 산마루에 그 투사와 허생과 왜냐 선생이 서 있었다. 
뒤따르던 말과 병사들이 나타나자 투사는 그들과 함께 마루를 넘어갔다. 
그 뒤에, 허리를 곧추세운 허생이 골짜기 아래쪽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다. 아이들을 낳거들랑 오른손에 숟가락을 쥐게 하고, 하루라도 먼저 난 사람이 먼저 먹도록 양보케 하여라! 그러고는 혼자서 훌쩍 마루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이제 왜냐 선생만 남았다. 그런데 아무도 뒤따라오는 이가 없었다. 선생님은 계속 거기 서 있었다. 눈보라가 점점 거세졌다. 선생님의 모습이 흐려져 갔다. 비장한 음악처럼, 허공에서 말소리가 울려 펴졌다. 말은 도구이다. 실체가 아니다. 말은 실체가 아니라 도구다……영웅……노동자……빨갱이……. 
나는 슬프다 나는 슬프다 자꾸 그렇게 중얼거리면, 슬프지 않는데도 눈물이 나올까? 눈물이 나오면 그 때는, 정말로 슬퍼질까? 취한 사람처럼 하루를 보냈다. K를 뒤따르다가 잃어버렸다. 
어느 교회로 들어가더니 나오지 않았다.
7월 13일

교회 앞에서 한나절을 서성인 끝에 K를 만났다. 예배보고 나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견한 K는, 그 때 천사 같았다. 
나는 무작정 뒤따라갔다. K는 얼마를 가더니 공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는 어디쯤에서 멈춰 섰다. 
나도 멈췄다. 
K가 다가왔다. 그리고 말했다. 그냥 따라오기만 하면 어쩔 참이니? 
나는 웃으려고 했는데, 그저 얼굴이 찌그러지다 만 느낌이었다. 
우리는 근처 나무 밑에 있는 붙박이 의자에 앉았다. 향기로운 비누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바람결에 K의 머리칼이 날렸다. 나는 머리칼에 덮힌 K의 귀를 훔쳐보았다. 
너는 글을 잘 쓰지? 아주 소문이 났더라. 시도 쓰니? 시는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연극을 좋아해. 내가 연극반인 거 알지? 시침 뗄 필요 없어. 전부터 네가 나한테 관심 있는 걸 눈치 채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실은 나도 글을 잘 썼으면 좋겠어. 그래서 언젠가 너하고 얘기를 했으면 싶었다구.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 거니? 
나는 글 얘기가 하기 싫어 연극반에서 무얼 맡느냐고 물었다. 
응, 배우야. 가을 예술제 때 '신판 춘향전'을 공연하는데, 내가 춘향이역으로 뽑혔어. 방학이 되면 본격적으로 연습할거야. 
엄마가 알면 공부대신 그런 짓이냐고 난리 나겠지만. 
그리고 K는 그 신판 춘향전이라는 것에 대해 길게 이야기했다. 춘향이는 로큰롤 음악을 무척 좋아하는 앤데, 몽룡이는 공부밖에 모르는 책벌레다. 둘이 자연농원에서 우연히 만나 사귀었는데, 나중에 대학에 붙는 건 몽룡이가 아니고 춘향이다. 몽룡이가 재수를 하는 동안 춘향이는 가수가 되어 전국을 누비는데… …. 
나는 듣다 말고 물었다. 그런 걸 학교에서 공연하라고 하겠니? 
그러엄. 연극반 선생님이 대본을 갖고 가서 교장선생님한테 벌써 허락 받았는걸. 그런 거라니? 너, 유치하다고 무시하는구나?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 얘기도 더 하고 싶지 않았다. K는 기분이 상한 듯 딴 데를 보고 있었다. 뽀오얀 목덜미가 눈부셨다. 
왜냐 선생 일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 그 분이 너무 이상에만 빠진 걸까? 
지금 왜 그런 얘길 하니? 문학을 한다는 애가? 아이들이 한낮의 햇별 속을 뛰어다니는 게 나무들 사이로 보였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인지 현기증이 났다. 
K, 오늘의 일기는 독백이나 같다. 늘 독백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만, K, 너의 이름을 지운다. 아니, 없앤다. 다 내가 하는 짓이다. 너는 없었다. 이경미가 있었을 뿐이다.
7월 14일
왜냐 선생의 허생전 셋째 시간은 없다! 아마 그 시간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 선생님한테 배울 허생전은 영원히 다 배우지 못하는 셈이다. 
아침에 등교하려니까 교문이 한쪽만 열려 있었다. 그리고 교문 주위에 교감과 교무주임 선생님, 그리고 못 보던 이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나는 설마 하였다. 하지만 교실에 들어가 아이들이 입 모아 하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건 사실이 되었다. 왜냐 선생님이 학교에 못 들어오게 막은 것이었다. 
온 학교가 술렁거렸다. 하지만 쉬는 시간만 그럴 뿐 수업시간은 전처럼 지나갔다. 나는 무엇에 관심조차 두기가 싫고 학교에 불이라도 나서 얼른 집에 가게 되었으면 하였다. 책마다 깨알같이 박힌 글과 누가 하는 그 어떤 소리도 모두 거짓말 같고, 눈보라치는 산마루의 그 투사가 자꾸 어른거렸다. 
국어시간에 담임선생님이 대신 들어오셨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 너무 자기 주장만 앞세워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이다. 모든 의사표시는 절차를 밟아 법대로 해야지 남이 어쩌잔다고 우우 거기에 쏠려서는 못쓴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허생이 선비의 법대로 돈벌이를 하지 않았다면 도둑들을 사람답게 살도록 해줄 수 있었을까요? 다수결이라면 그야말로 이완대장이 좋아하는 건데, 그럼 선생님은 세력 있는 자들의 눈치나 보는 이완대장이 옳고 그를 찌르려던 허생은 그르단 말씀입니까? 
하지만 몸 속 어딘가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 왔다. 안돼. 그건 네 일이 아냐. 네 일은 따로 있어. 딴 곳에 있어. 네가 이완대장의 세상을 알기는 아는 거야? 
그 때 선생님이 날카롭게 말했다. 
"박윤수는 어디 갔지?" 
나는 소스라치며 살펴보았다. 윤수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어디가 아파 양호실에 갔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누군가가 말했다. 
선생님, 저기 저게……. 
창밖을 보았다. 땡볕이 쏟아지는 누우런 운동장 한가운데에 누가 홀로 주저앉아 있었다. 윤수였다. 무릎 앞에 무어라 적힌 종이가 세워져 있었다. 나는 온몸이 떨렸다. 그 종이에 적힌 말은 보이지 않아도 읽을 수 있었다. 아이들이 우르르 창가로 몰렸다. 
자리에 앉아라, 앉아! 저, 저 녀석이 퇴학당하고 싶어서! 선생님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온몸의 움직임을 또렷이 느끼면서 복도를 지나, 운동장 가운데로 뛰기 시작했다. 윤수가 땅바닥에 누워 버리는 게 보였다. 내가 업으러 가는지 업히러 가는지 알 수 없었다. 
왜냐 선생의 허생전 수업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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