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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록예찬 - 이양하 (조선일보/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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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록예찬 -  이양하 
 
봄 여름 가을 겨울, 두루 사시를 두고, 자연이 우리에게 내리는 혜택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나 그 중에도 그 혜택을 풍성히 아낌없이 내리는 시절은 봄과 여름이요, 
그 중에도 그 혜택을 가장 아름답게 내는 것은 봄, 봄 가운데도 만산에 녹엽이 싹트는 이 때 일 것이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먼 산을 바라보라. 어린애의 웃음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오월의 하늘, 나날이 푸르러 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새로운 경이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 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어 녹음을 스쳐 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곧 모든 것을 가져올 듯하지 아니한가?
오늘도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맑고, 우리 연전 일대를 덮은 신록은 어제보다도 한층 더 깨끗하고 신선하고 생기 있는 듯하다. 나는 오늘도 나의 문법 시간이 끝나자, 큰 무거운 짐이나 벗어놓은 듯이 옷을 훨훨 떨며, 본관 서쪽 숲 사이에 있는 나의 자리를  찾아 올라간다.
나의 자리래야 솔밭 사이에 있는 겨우 걸터앉을 만한 조그마한 소나무 그루터기에 지나지 못하지마는 , 오고 가는 여러 동료가 나의 자리라고 명명하여 주고, 또 나 자신도 하루 동안에 가장 기쁜 시간을 이 자리에서 가질 수 있으므로, 신간의 여유 있는 때마다 나는 한  특권이나 차지하듯이, 이 자리를 찾아 올라와 앉아 있기를 좋아한다.
물론 나에게 멀리 군속을 떠나 고고한 가운데 처하기를 원하는 선골이 있다거나, 또는 나의 성미가 남달리 괴팍하여 사람을 싫어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역시 사람 사이에 처하기를 즐거워하고, 사람을 그리워하는 갑남을녀의 하나요, 
또 사람이란 모든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사람으로서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사람 사이에 살고, 사람 사이에서 울고 웃고 부대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때─푸른 하늘과 찬란한 태양이 있고, 황홀한 신록이 모든 산, 모든 언덕을 덮은 이 때, 기쁨의 속삭임이 하늘과 땅, 나무와 나무, 풀잎과 풀잎 사이에 은밀히 수수되고, 그들의 기쁨의 노래가 금시라고 우렁차게 터져 나와, 산과 들을 흔들 듯한 이러한 때를 당하면, 나는 곁에 비록 친한 동무가 있고, 그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자연에 곁눈을 팔지 않을 수 없으며, 그의 기쁨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사람이란─세속에 얽매여, 머리 위에 푸른 하늘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주머니의 돈을 세고, 지위를 생각하고, 명예를 생각하는 데 여념이 없거나, 또는 오욕 칠정에 사로잡혀,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는 데 마음에 영일을 가지지 못하는 우리사람이란, 어떻게 비소하고 어떻게 저속한 것인지.
결국은 이 대자연의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조화를 깨뜨리는 한 오점 또는 한 잡음밖에 되어 보이지 아니하여, 될 수 있으면 이러한 때를 타서, 잠깐 동안이나마 사람을 떠나 사람의 일을 잊고, 풀과 나무와 하늘과 바람과 한가지로 숨쉬고 느끼고 노래하고 싶은 마음을 억제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또, 사실 이즈음의 신록에는 우리 마음에 참다운 기쁨과 위안을 주는 이상한 힘이 있는 듯하다. 신록을 대하고 있으면, 신록은 먼저 나의 눈을 씻고, 나의 머리를 씻고, 나의 가슴을 씻고 다음에 나의 마음의 모든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씻어 낸다. 
그리고, 나의 마음의 모든 티끌─나의 모든 욕망과 굴욕과 고통과 곤란이 하나하나 사라지는 다음 순간 , 별과 바람과 하늘과 풀이 그의 기쁨과 노래를 가지고 나의 빈 머리에, 가슴에, 마음에 고이고이 들어앉는다. 말하자면, 나는 흉중에도 신록이요, 나의 안전에도 신록이다.
주객 일체, 물심 일여라 할까, 현요하다 할까, 무념무상, 무장무애, 이러 한 때 나에게는 아무런 감각의 혼란도 없고, 심정의 고갈도 없고, 다만 무한한 풍부의 유열과 평화가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또, 이러한 때에 비로소 나는 모든 오욕과 모든 우울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고, 나의 마음의 모든 상극과 갈등을 극복하고 고양하여, 조화 있고 질서 있는 세계에까지 높인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러기에, 초록에 한하여 나에게는 청탁이 없다. 가장 연한 것에서 가장 짙은 것에 이르기가지 나는 모든 초록을 사랑한다. 그러나 초록에도 짧으나마 일생이 있다. 봄바람을 타고 새 움과 어린 잎이 돋아 나올 때를 신록의 유년이라 한다면, 삼복 염천 아래 울창한 잎으로 그늘을 짓는 때를 그의 장년 내지 노년이라 하겠다.
유년에는 유년의 아름다움이 있고, 장년에는 장년의 아름다움이 있어, 취사하고 선택할 여지가 없지마는, 신록에 있어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역시 이 즈음과 같은 그의 청춘 시대─움 가운데 숨어 있던 잎의 하나 하나가 모두 형태를 갖추어 완전한 잎이 되는 동시에, 처음 태양의 세례를 받아 천신하고 발랄한 담록을 띠는 시절이라 하겠다. 
이 시대는 신록에 있어서 불행히 짧다. 어떤 나무에 있어서는 혹 2,3주일을 셀 수 있으나, 어떤 나무에 있어서는 불과 3,4일이 되지 못하여, 그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은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이 짧은 동안의 신록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참으로 비할 데가 없다. 초록이 비록 소박하고 겸허한 빛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때의 초록은 그의 아름다움에 있어 어떤 색채에도 뒤지지 아니할 것이다.
예컨대, 이러한 고귀한 순간의 단풍 또는 낙엽송을 보라. 그것이 드물다 하면, 이 즈음의 도토리, 버들, 또는 임산에 있는 이름 없는 이 풀 저 풀을 보라. 그의 청신한 자색, 그의 보드라운 감촉, 그리고 그의 그윽하고 아담한 향훈, 참으로 놀랄 만한 자연극치의 하나가 아니며, 또 우리가 충심으로 찬미하고 감사를 드릴 만한 자연의 아름다운 혜택의 하나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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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이양하(李敭河, 1904~1963): 수필가. 영문학자. 평남 강서 출생. 평양고보, 일본 제3고등학교, 동경 제국대학 영문과 동 대학원 졸업. 연희전문 교수. 서울대 문리대 교수. 그의 수필은 개인적이면서 통찰력과 직관력이 뛰어나 객관적이면서 경구적(警句的)인 수필을 쓴 김진섭(金晉燮)과 한국 수필의 쌍벽을 이루고 인포말에세이의 대표를 이룸. 명사적이면서도 생활주변에 관심을 두어 국화인 무궁화의 본성과 그 의미를 보여준 ‘무궁화’, 연희전문 교수 재 직시 뒷산에 올라 가 신록을 예찬한 ‘신록예찬’ 등 주옥과 같은 작품이 수록된 <이양하 수필집>이 있다. ‘나무’는 그의 대표작임.
 

2.  감상의 길잡이 1
  이 글은 한국 현대 서정 수필의 경지를 개척하여 수필을 하나의 주변적인 글에서 독자적 장르로 확립하는 데 앞장섰던 이양하의 대표적 수필이다. 표면적으로는 자연의 혜택과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있으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세속적인 삶의 태도를 반성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또한 이 수필은 사물에 대한 치밀한 관찰력, 예리한 심미안(審美眼), 자연과의 교감(交感)의 자세가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치밀한 문체로 자연 현상을 긍정적인 태도로 다루는 관조적 해석력이 돋보인다.
  이 글에 나타난 작자의 개성은 온후(溫厚)하고 단아(端雅)하다. 자연을 소재로 하여 자연에 몰입하는 친화적 태도로써, 인간의 가치보다 자연의 가치를 더 긍정함에 비판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한편 표현에 있어서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서술과 묘사로써 적절히 배합하고  있다. 점층법과 설의법, 열거법과 직유법 등을 구사하여 주제를 부각시키는가 하면, 적절한 한자어의 사용으로 전아한 분위기를 도모해 표현의 묘미를 살리고 있다.
 

3.  감상의 길잡이 2
  우리 주변에는 아름다운 자연의 대상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그러나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처 그 아름다움을 깨닫지 못하고 스쳐 보내고  마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이다. 그러나 불현듯이 고개를 들었을 때 우리들의 시야를 사로잡고 마는 아름다운 자연이 있다. 그것은 때로는 이름없는 들녘에 핀 꽃이기도, 마악 저물어가는 단풍나무 숲이기, 맑고 투명 한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는 작은 시냇물이기도 할 것이다. 이 아름다움을 자신의 주변에 풍부하게 거느리는 것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 싶다. 삶이란 수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거느리고  있는 것이기에.
  이양하의 수필은 이러한 아름다운 세상을 놓치지 않고 그려내고 있다. 그것은 때로는 나무이기도(‘신록예찬’)때로는 민족의 꽃 무궁화(‘무궁화’)이기도, 또 때로는 우리들의 이웃에서 웃고 떠드는 어린 아이들 (‘건이 경이’) 이기도 하다. 이양하는 이러한 작고 아름다운 세상의 아름다움을 잘 묘사함으로써 우리들 삶을 보다 풍요롭게 만드는 수필가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적어도 수필의 세계가 지닌 본질이기도 하다. 작은 대상, 일상적인 체험으로부터 우러나온 생활의 경험을  거듭거듭 사색을 통해 반추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길어 올리는 것이 바로 수필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먼저 대상을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대상은 만신에 녹엽이 싹트는 시절의 신록이다. 오월의 하늘을 배경으로 그 여릿여릿한 초록의 싹을 내미는 오월의 신록이 이 글의 대상이다. 이어서 신록의 숲 속에서 올려다본 푸른 잎사귀들을 보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자신의 심경을 드러내고 있다. 세속으로부터 떠난 순수함 그 자체로의 신록을 자신은 좋아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인간의 모습은 전적으로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뒷전으로 빌려난다는 의미이다. 필자는 신록을 통해 번잡한 세상에서 잠시라도 떠나 순수하고 밝은 아름다움을 누리고 싶다는 주장이다. 나아가 그 모든 초록이 다 좋으나 유독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청신하고 발랄한 담록이라는 주장으로 글을 끝맺고 있다.
  수식을 최대한 절제하면서 사색을 자유롭게 펼쳐 나가는 것이 이 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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